코로나19와 함께하는 두 번째 가을
news letter No.706 2021/11/30
아직도 코로나 시국입니다.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시기입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몇 가지 문제를 펼쳐놓고 생각해봅니다. 기후위기, 생태문제는 팬데믹 이래로 더욱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역과 경제, 사회안정 모두를 잡는다는 명목 하에 배달, 택배 이용, 일회용품 사용이 급증하여 쓰레기 문제와 환경오염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디스토피아적 미래, 혹은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최첨단의 기술이 현실에 도입되는 미래의 꿈이 점점 더 커지는 듯합니다. 한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이란 화두가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대학들은 앞다투어 인공지능을 비전으로 내걸거나 관련과정을 신설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모임이 급속히 일상화된 현재, ‘디지털 혁명’, ‘언택트 시대’, ‘온택트’, ‘메타버스’ 등의 키워드가 추가로 거론됩니다. 특히 가상세계의 새로운 삶이자 무한한 기회로 일컬어지는 ‘메타버스’는 이미 도래한 미래로 일컬어집니다.
과학기술에 의지하여 코로나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발전에 힘입어 백신이 개발되었음은 물론 비대면, 가상세계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의 제한적 상황을 극복하여 나아갑니다. 그 이점을 한껏 누리고 있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삶에 관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음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단순히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가상세계에서 더 많이 호흡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주린 배를 채울 수도 없으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은 온갖 생명이 저마다의 생존을 위해 투쟁, 기생, 협력하는 착종된 현실입니다. 매 순간 삶을 살아내는 생명체인 우리는 여전히 온갖 세균과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헤쳐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부분은 여전히 그 분야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가정과 노약자를 위한 돌봄 노동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분들은 사회에서 높이 평가되거나 넉넉한 보수를 받지도 못합니다. 이 영역에서 헌신하는 분들 없이는 우리 일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원거리 화상모임의 정착으로 비대면 만남은 활성화되었지만, 물류의 흐름 만큼은 반드시 직접 이루어져야 합니다. 올해 초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된 적이 있습니다. 글로벌 수준의 대 물류난, 유가 급등을 우려하며 세계가 한바탕 떠들썩했던 사건이 이제는 벌써 잊힌 듯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던 사람들의 이동은 많이 축소되었으나, 여러 국가들의 광범위한 이해관계가 얽힌 물류의 흐름은 여전할뿐더러 아마도 더욱 급증했을 것입니다. 일상의 수준에서도 부쩍 증가한 배달 오토바이와 택배 차량을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담당자들이 기계가 아닌데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물량을 소화해 내려다가 과로사, 사고사를 당했다는 기사 또한 그러합니다.
그래서 아마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가 자주 오픈 시크릿으로 귀결되나 봅니다. 이런 이야기 말입니다. 안전한 지상낙원으로서의 멋진 캡슐 속의 인간이 손가락 까딱 안 하고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온갖 문제를 그 안에서 간단히 해결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누리는 모든 권력과 자유의 근본적 에너지원이 또 다른 생명과 인간 희생에 기대어 나온 것이더라는 뻔한 결론 말입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향유하는 복락이란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공존’ 때문이라는 오픈 시크릿 말이지요.
우리들은 원인을 추측하고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여러 과정적 행위를 수행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해본다고 기대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믿고 고수하고 싶어도 불명확한 인과관계는 너무나 많습니다. 바이러스를 완벽히 고립, 박멸시키는 시나리오가 불가능함을 우리는 이미 잘 압니다. 코로나와의 ‘전쟁’이나 ‘탈’ 코로나 보다, ‘함께’라는 수식어가 붙는 ‘위드코로나’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위드 코로나로 나아가기까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위드 코로나는 최단 시간에 개발되어 부작용 논란이 많더라도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위드 코로나는 경제 논리로 생겨났다는 둥 그 배경이 의심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함께’라는 말이 더 현실적이며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는 바이러스가 나, 혹은 나와 함께인 생/생물에 옮겨와 ‘함께’ 하는 것, 또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뜻하니까요.
올해 초까지만 해도 동네 한 학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면 학생 신상이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았습니다. 동네가 들썩들썩했습니다. 소문에 매우 어두운 제 귀에까지 들어오는 것은 지나치게 많이 이야기가 퍼졌다는 것이지요. 확진자와 그 가족이 왜 더 조심하지 않아 주변에 피해를 주냐는 질책과 원망의 발언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매우 더디지만 이전보다는 좀 더 반응이 차분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개인정보를 보호해주는 감각도 아주 조금씩이나마 더 성숙해지고 있지 않나 기대해봅니다. 누구나 확진자가 될 수 있으며 서로 이해하고 의지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서서히 자리 잡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작게나마 희망을 걸어봅니다.
작년 초, 심포지엄 기획 단계에서 나온 주제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종교, 종교학’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팬데믹이 종료된 상황 속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심포지엄 준비팀은 작년부터 올해까지 오직 온라인 회의를 통해서만 모였습니다. 온라인 회의를 통해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모두 바빴으니까요. 마침내 심포지엄마저 순수하게 온라인으로만 개최되었습니다. 준비모임부터 그 마무리까지 순수하게 비대면으로 진행된 한종연의 첫 번째 심포지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대면 심포지엄의 결실로 엮인 이번 특집의 주제는 “코로나19 이후의 종교와 종교학”입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보다는 소박하게 ‘코로나19 이후’ 정도로 범위를 좁혔습니다. 모두가 지금 경험해가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종교와 종교학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 어떠한 변화의 방향성이 예측되는지 등에 대해 네 연구자가 고민을 담아보았습니다. 대주제 하에서 총 네 편의 주제와 방법론은 상이합니다. <코로나 시대의 종교와 공간>, <코로나 시대, 서구 위기담론에서 드러난 근대국가와 종교문제>, <팬데믹 상황의 종교적 도덕성에 대한 진화인지적 시론>, <코로나19 시대 민속종교의 반응과 대응>이라는 제목을 놓고 보아도 그 다양성이 금방 드러납니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이 다양성을 낯설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허나 아직 이야기되지 않거나 속 시원한 대답을 듣기 어려운 수많은 의문들이 파편적으로 부유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각자 처한 현실 속에서 지극히 일부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확실한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수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그것이 정말 확실한지 알 수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과 관련한 과학적 논의마저 시시각각 변화하여 우리는 상반된 정보를 동시에 접하기도 합니다. 아직 짙은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이 시기에 각 연구자가 종교, 종교학과 관련하여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변화하리라 예측되는 부분에 대한 학문적 고민과 탐구를 펼쳐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헤아리며 읽어주시길, ‘함께’ 고민하며 나아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반 연구논문은 총 3편입니다. 흥미진진한 내용들이며 주제 또한 다양합니다. 첫 번째 논문은 종교사적 접근의 이론적 토대로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을 접목한 종교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논문은 힌두 사상으로부터 한국 그리스도교적 사유를 풍성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자양분을 취한 유영모와 함석헌 사유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논문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종묘의 공민왕 신당과 수복 연구를 통해 당대의 종교 문화적 특성을 해명합니다. 각 분야의 깊이 있는 연구 성과들이 이번 호에도 독자들을 기다립니다.
이번 호의 설림은 종교와 종교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소박한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거룩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가 전통과 경전에 기대어 신자들을 향해 ‘영성’에 대해 여러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영성이란 그 종교의 내부자, 더 나아가 외부자에게도 정확히 무엇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어려운 그 무엇으로 남습니다. 설림을 읽으며, ‘영성’이라는 말에 사로잡히기보다 삶의 한 가운데 어느 지극히 평범한 순간 문득 열리는 일상의 발견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와 함께 하는 두 번째 가을입니다. 이번호의 다채롭고 풍성한 글을 읽으며 우리 삶과 배움의 길에서 견실하고 아름다운 열매들이 무르익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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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종교문화비평>40호(2021년 9월 30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 입니다.
김태연_
숭실대학교 조교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사무국장
논문으로 <슐라이어마허 『종교론』의 수용사적 의미> <독일 개신교와 사회복지: 19세기 중반 ‘디아코니’의 역사적 함의를 중심으로>, <20세기 초 천도교의 ‘新人間’ 비전: 야뢰 이돈화의 『新人哲學』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