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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에 대한 단상
news letter No.718 2022/2/22
불교의례에 대한 교계와 학계의 관심이 전례 없이 높은 시절이다. 어쩌다 보니 필자도 여기저기에서 말 한 마디, 글 한 줄 얹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불교의례’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라 하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헤아려지는 가짓수는 수륙재, 영산재요 예수재이고, 떠오르는 장면은 바라무, 작법무와 범패스님들의 소리이다. 거기에 점안식이나 복장의례와 같은 이야기들이 들리면 아차 싶다. 그뿐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수계식이나 포살법회 같은 행사들도 저마다의 요식이 있으니 엄연히 의례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례의 정의와 범주를 넉넉하게 해야 할 테다. 사실은 일상생활 행주좌와 시의 모든 규범과 예법에서부터 따져 물어야 할 일이다. 규범과 예법의 체계 전체를 지향하는 용어인 의례(儀禮, ritual)와 그것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행위 작법에 더 어울림직한 의식(儀式, rite ; ceremony)이라는 용어의 개념 구분도 학문적으로는 선행될 필요가 있다. (rite에 비해 ceremony는 세속적 행사에 보다 많이 쓰이는 용어라는 지적이 있지만, ceremony가 반드시 세속적인 용례에 국한될 이유는 없다. 오히려 rite가 하나의 행사에서 일정하게 짜여진 법식에 가깝다면, ceremony는 그 법식 하나하나를 이루는 단발적이고 일회적인 행위 동작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진 개념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일단은 의례와 의식 사이의 개념 구분에 구애받지 않은 채, 매일매일 사찰에서 스님들이 모여 하는 의례의식들부터 챙겨보기로 한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사찰의 일상에 밀착한 일용의례를 참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매체 발달의 추세에 힘입은 영향인지 한국의 많은 사찰에서 여러 불교 행사를 촬영하여 유튜브로 제공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하는 처지에 고맙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TV 방송국인 BTN에서 해인사 새벽예불(2021년), 2021년 통도사 사시불공(2021년), 송광사 저녁예불(2017년)의 전 과정을 낱낱이 촬영하고 자막과 영상 편집까지 멋지게 곁들인 동영상을 살펴보았다. 지면 관계상 이 글에서는 예불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새벽예불은 담당 스님 한 분이 법당 앞에서부터 목탁을 치고 다라니와 게송을 낭송하며 도량 즉 사찰을 도는 도량석(道場釋)으로부터 시작한다. 다라니(陀隣尼)는 산스크리트어 dharani 의 음역어로서, 진언(眞言), 총지(總持) 등으로도 의역되는 주문(呪文)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산스크리트어 음가를 그대로 차용하는데, 주문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 말들 자체에 강력한 주술적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여러 의례에서 대단히 많은 다라니가 사용되지만, 각 다라니의 취지와 용도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 그 정확한 산스크리트어 의미를 그대로 아는 이는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경전 내용을 요약하거나 하고자 하는 말의 취지를 담은 시구이다. 본래 산스크리트어이기도 한 것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읽혀져 왔는데, 최근에는 한문 게송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부르기도 한다.
해인사 도량석은 입으로 지은 업을 정화시킨다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과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방위의 신들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을 시작으로, 경전을 여는 게송 즉 불경을 외우기 전에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미하는 글귀인 개경게(開經偈 :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지실의 ;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 더없이 높고 깊은 미묘한 진리, 백천만겁 지나도 만나기 어려우나, 내가 이제 듣고 보고 받아 가지니, 여래의 진실한 뜻 깨닫겠습니다.)와 진리의 도량을 여는 다라니 즉 경전을 펼칠 때 외우는 주문인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 옴 아라남 아라다)를 읊고, 마지막으로 신라시대 해동 화엄종의 교조인 의상스님의 법성게(法性偈)를 낭송하며 끝이 난다.
도량석에 맞물리며 종송(鍾頌)이 이어진다. 이것은 법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담당 스님 한 분이 법당 내에 설치된 작은 종을 여러 번 치며 게송과 함께 지옥을 파괴하는 힘을 지닌다는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 등을 낭송하는 과정이다. 종송 뒤에 사물(四物)이 이어진다. 사물은 법고(法鼓), 범종(梵鐘),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네 가지 물건을 말한다. 보통 사물각(四物閣)이라는 별도의 건물을 지어 사물을 한꺼번에 보관하지만, 이 중 범종은 범종각에 따로 설치하기도 한다. 법고 즉 북과 범종은 일반적으로도 사용되는 물건인 만큼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겠으나, 목어와 운판은 불교인이 아닐 경우 생소할 수도 있다.
목어는 한 자 남짓한 길이의 통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이다. 아래에서부터 속을 파내어 그 안에 막대기 두 개를 집어넣어 두드리며 소리를 낸다. 운판은 얇은 철판을 구름 모양으로 마름질한 것이다. 역시 채로 두드리며 소리를 낸다. 네발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법고 소리는 축생의 구제를, 범종 소리는 인간과 지옥 중생의 구제를, 목어는 물짐승의 구제를, 운판은 날짐승의 구제를 의미한다.
사물의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예불 과정이 시작된다. 앞서 종송을 쳤던 그 자리에서 예불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불쇠를 친 후, 도량석에서 사물에 이르는 사이 법당에 운집한 승가 대중이 오분향례(五分香禮)와 헌향진언(獻香眞言)을 하는 것이 그 시작이 된다. 오분향례란 부처가 갖추고 있는 5종의 공덕인 계신(戒身)·정신(定身)·혜신(慧身)·해탈신(解脫身)·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의 다섯 가지 법신[五分法身]을 향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계·정·혜는 석가모니 시대부터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으로 알려진 3학(三學)의 내용이고, 해탈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윤회에서 벗어난 상태이며, 해탈지견은 그러한 해탈의 상태를 자각하는 인식이라고 한다. 어찌됐던 그 모두 부처가 도달한 수행의 경지이며, 그러한 경지에 다다른 부처의 몸을 향에 비유하여 예를 올리는 것이다. 대중을 대표하여 스님 한 분이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라고 한 뒤에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이라는 게송을 낭송한다. 이 게송을 해인사 아침예불에서는 한글로 풀이하여 “광명세계 두루하여 시방세계 한량없는 삼보님전 공양합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순서가 일반적으로 칠정례 또는 지심귀명례라고 알려진 예불문이다. 불법승 3보를 석가모니, 기타 부처들, 진리의 교법, 문수·보현·관세음·지장의 4대 보살, 부처 시절의 아라한들, 동아시아로 불법을 전한 스님들, 승가 대중 등 7부류로 나누어 대중 전원이 소리를 맞추어 각각 호명하고, 그 각각의 호명에 맞추어 7번 절을 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예불 의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중단의 신중들을 향해 반야심경을 낭송하며 예불은 끝이 난다. 해인사에서는 칠정례와 반야심경 낭송도 모두 한글로 풀어서 하고 있다.
저녁예불에는 도량석이 포함되지 않는다. 도량석이라는 과정 자체가 사찰의 대중을 잠에서 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저녁예불 때는 이 과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에는 종송에서부터 반야심경까지 전 과정이 아침예불과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다만 종송게와 파지옥진언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또 아침예불의 경우 저녁예불과 달리 파지옥진언 뒤에 길게 이어지는 게송과 염불이 있는데, 아침예불에 포함되는 이것을 장엄염불이라고 한다. (해인사와 송광사 두 사찰의 문화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아침과 저녁 예불 자체의 차이 때문인지 두 동영상만으로는 불분명했는데, 송현주 선생님의 박사논문 〈현대 한국불교 예불의 성격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에서 내막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사물에서 범종을 치는 횟수도 아침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으로 차이가 있다. 이 숫자에 대해 불교에서는 각각 3계 28천과 제석천 33천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왜 하필이면 각각 그 같은 상징성을 띄게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김일권 선생님이 〈한양도성의 중심점 원각사의 십층탑과 대종에 대한 土中 공간론과 佛天의 시공간학 코스몰로지〉(《민속학연구》 49, 2021)에서 규명을 시도한 바 있다.) 예불문인 칠정례는 송광사의 경우 한문식으로 하고, 반야심경은 해인사와 마찬가지로 한글을 채택하였다.
동영상들을 지켜보며 나붓나붓 떠오르는 단상 세 가지가 있었다. 더 깊이 숙고하지 않고 더 넓게 들어오는 생각들도 모두 쳐버린 채, 그저 처음에 떠올랐던 그 세 가지를 적어 본다.
단상 하나. 사찰에서는 매일매일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는구나. 이 글에서는 미처 소개하지 못했지만 매일매일 식사를 올리는 사시마지 불공까지 감안하자면, 꼭 살아계신 스승님과 함께 생활하듯이 행동하는구나. 석가모니는 입멸 직전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지 말고 나의 가르침을 따르거라.”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스님들은 그렇게 돌아가신 부처님께도 살아계신 것과 똑같이 대하는구나.
단상 둘. 아침예불의 도량석은 차치하고 종송 과정부터만 보자면,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예불인데도 꼭 중생에 대한 구제의 행위를 앞세우는구나. 종송은 파지옥진언을 외치며 지옥중생에 대한 구제를 염원한다. 사물에서는 그 대상이 들짐승과 물짐승, 그리고 날짐승에게까지 확장된다. 이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부처님께 어떤 다짐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상구보리뿐 아니라 하화중생까지 이룩해야 된다는 대승불교의 종교적 목표를 스스로 확인하는 것일까. 이 행위들이 이렇게 확정된 경위는 또 어떠한가. 의미로 가득 찬 어떤 이념을 일부러 꾀를 짜내어 몸짓으로 형상화한 것일까, 아니면 본래부터 있었던 어떤 몸짓이 그런 의미를 띄고 재해석된 것일까.
단상 셋. 구제를 위한 물건은 하나같이 구제하는 대상을 연상하기에 마땅한 재료나 모양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범종의 경우는 불분명하지만, 법고의 재료는 구제 대상인 네발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졌고(그런데 구제를 하기 위해 그 가죽을 벗기다니!) 목어와 운판은 각각 물고기와 구름 모양으로 조형된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접촉과 유사의 주술 원리를 발견한다. 이 원리는 혹시 불교의례의 가장 작은 세레머니 단위에서부터 하나의 의례를 완성하는 구조 전체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수륙재나 영산재 같은 특별한 의례까지 갈 것도 없이, 매일매일의 일용의례에서도 불교의 의례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다. 일상을 재현하고 가치를 재현하고 물질을 재현한다. 그리고 그 재현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가장 직접적인 경험과 직관적인 상상에 닿아 있다. 탈속과 물질 본성의 부정을 추구하는 불교에서 만나게 되는 이 일상과 물질성에 대한 어마어마한 추구. 의미와 이념이 아니라 감각과 물질로 의례를 바라봐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찾는다.
좋은 글로 공부를 인도해 주신 송현주 선생님과 김일권 선생님께 지면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으로 〈조선전기 도첩제도 연구〉가 있고, 논문으로 〈조선 세종 대 승역급첩의 시작과 그 의미〉,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불공(佛供)・승재(僧齋)・시식(施食)의 3종 공양을 중심으로〉, 〈불교의 자비행에 내포된 행복 메커니즘-진화심리학과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관점을 중심으로〉, 〈불교에서 점복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일고찰-《점찰경》에 나타나는 방편의 위계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법화계 불교종단의 역사와 성격〉, 〈여말선초의 승군 개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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