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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15호-어떤 소수자의 변(辯)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1. 28. 22:57

어떤 소수자의 변(辯)

news letter No.715 2022/2/1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린다면 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못 먹습니다. 대체로 제 이러한 태도에 대한 반응은 그 까닭이 종교적인 데 있으리라는 짐작으로 채색됩니다. 그래서 때로 저는 뜻밖에도 힘들게 순수를 유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짐작이 저를 겨냥하는 것을 넘어 제가 속한 종교와 그 교조와 그 종교의 신에 대한 격한 비난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저 때문에 특정한 종교의 2천년 역사와 문화가 한꺼번에 처참하게 모욕을 당합니다.

     그런데 어느 편이든 그것이 제 ‘사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아닙니다.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순전히 생리적인 탓이기 때문입니다. 맥주 한 잔이면 아슬아슬하게 괜찮습니다. 그런데 두 잔을 마셨다가 무척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 일입니다. 손발 끝이 자리자리하고 머리가 이상하게 흔들린다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에 깨지듯 아픈 두통 때문에 잠이 깼습니다. 그 순간의 괴로움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는지요. 어쩌면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의 아침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조금은 경멸의 분위기를 담고 꽤 살기 힘들었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몰골로 이제까지 살아남았느냐고 연민의 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하면서 어찌 감히 인생을 알겠다는 학문의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고 다니느냐고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린다면 불편한 것도 없지 않았고, 힘든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괴로운 것은 술을 마시고 싶다는 희구를 넘어 마셔야만 한다고 스스로 다짐해 본적이 있는데 몸이 견디지 못해 이를 감행하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느낀 좌절감입니다. 까닭인즉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아득한 역사, 그것도 종교사를 살펴보면 술이 없는 의례는 없습니다. 그렇게 단언해도 좋을 만큼 술은 ‘종교적’입니다. 무릇 종교라는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삶 속에서 절감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 바로 그 유한성에서 비롯하는 문제를 무한성 속에서 풀려고 하는 꿈을 구체화한 것인데, 그 넘어섬의 가장 직접적인 것이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나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엑스타시(ecstasy 脫自)라고 하죠. 일상에서는 겪지 못하는 황홀경의 경험이라고 서술되기도 합니다. 문제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종교의 가르침은 대체로 초월적인 개념, 신성한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벗어나는 일은 어떤 ‘비일상적인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종교에 따라 신(神)으로, 기(氣)로, 옴(Om)으로, 우주적인 원리 등으로 제각기 다르게 묘사됩니다. 하지만 결국 ‘신비스러운 힘’에 의한 것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힘의 간여를 기다리기 이전에 인간은 탈자적인 경험을 초래하는 일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사실입니다. 술이 그것입니다. 그 술을 소마(soma)라고 일반화하여 일컫는데, 이는 고대인도의 베다시대 의례에서 마시던 즙의 이름을 차용한 것입니다. 사람이 성급했는지, 아니면 신의 간여가 너무 더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탈자의 황홀경을 인간은 술을 통해 스스로 마련하면서 그것이 낳는 ‘더 이상 문제없음의 희열’을 미리 몸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근거한다면 술 취함은 술을 마시는 사람이 의식을 하든 않든 가히 ‘종교적’경험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 자취가 이러한데도 대체로 종교들은 금주를 계율로 지킵니다. 이 지킴의 세고 약한 차이는 있지만 거의 그러합니다. 이런 사실은 이른바 ‘화학적 엑스타시(음주나 마약)’와 ‘종교적 엑스타시’가 과연 같을까 다를까 하는 격한 논쟁을 일으키면서 이제는 이 주제가 뇌과학을 중심으로 한 인지과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목할 만한 사실임을 유념하면 더 그러합니다. 그런데 저처럼 못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사태는 아무래도 화학적 엑스타시에 치인다는 것을 절감한 종교적 엑스타시가 선수를 쳐 자기를 방어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뚤어진 심사를 가졌으니 종교학을 공부한다는 주제에 술을 먹어야, 술에 취해봐야 하겠다는 욕심을 감히 부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술을 먹지 못해 경험한 좌절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못 마시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음주문화를 바라보는 ‘재미’도 없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술은 종교적이다’라는 맥락에서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술 취함’이 아니라 ‘술에서 깸’입니다. 깸은 황홀경의 파괴이고 문제없음에서 문제있음에로의 회귀임에 틀림없는데 ‘왜 취함에 머물지 않고 깸에로 되돌아오는가?’ 하는 멍청한 질문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른바 주선(酒仙)을 기리는 그 숫한 향기롭고 그윽한 운문(韻文)들이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쌓이고 쌓였는데 그 내용인 즉 거의 깸에 대한 아쉬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거기 머물면 어떻습니까?
      아주 못된 작위적인 질문인 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취함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아쉬움을 지닌 채 깸의 자리에 돌아와 여전히 취함에서의 경험, 곧 ‘자기를 벗어난 자기’의 정서를 지니고 거기에서 비롯하는 논리와 판단과 결정으로 일상을 구축해 나가는 모습이 저에게는 감히 ‘보인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취함과 깸으로 점철하는 주체들 간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유기적인 관계가 구조화되어 그렇다고 하는 자의식조차 없을지 몰라도 저 같은 소수자의 눈에는 어쩐지 ‘취함의 풍토’에서 온갖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일상을 넘어선 자리에서 일상을 치다꺼리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짓이 결국 누구나 속한 삶의 틀 전체의 아귀를 뒤틀리게 하지는 않는가? 하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의 문화사를 훑어보면 소마를 마시는 일은 일반적으로 의례에서만 허용됩니다. 그런데 의례는 일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일상을 단절하고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어해야 할 것은 ‘사건을 일상화’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된 자리에서는 자칫 ‘일상과의 적합성을 확보하지 못한 병든 인식’만이 사물을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어한 것이 종교가 설정한 금주라는 계율의 본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주선(酒仙)들의 황홀한 즐거움에 흠을 낼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실은 술 마시는 일이 은근히 부럽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의 인권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술 못하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도 가지면서 이런 발언도 한 번쯤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한 제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학교에서 은퇴할 때 다음과 같은 후배의 ‘헌사(獻辭)’를 받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가 10여 년 전에 단란주점과 룸살롱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참으로 당황한 가운데 ‘거기에는 수업료가 필요하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 후에도 몇 번 그런 말이 오고갔지만 우리 사이에 아직 수업료가 오간 적은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정 선배에게 이렇게 대답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수업료도 필요 없다’고. 정 교수는 수업료를 내 본적이 없는 인문학자의 표본으로 남아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저녁 회식자리에서 소주 몇 잔으로 거나해지면 ‘사랑의 미로’를 그럴 수 없이 달콤하게 부르던 이 헌사를 읽어준 후배 윤이흠 교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어언 10년이 지났습니다. 진작 수업료를 내고 단란주점이든 룸살롱이든 함께 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새삼 저를 저리게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글은 이미 전에 썼던 글에 좀 첨삭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지난 번 <종교문화다시읽기>에서 박규태 선생님이 쓰신 “추사의 미학”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는데 무엇보다 글 전체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추사가 했다는 “知無不言 言無不振”을 만난 것도 처음입니다. 박 선생님의 풀이를 따르면 이는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글이 이렇게 읽히더군요. “아는 것이 없으면 말하지 말지니, 말하지 않으면 그나마 바닥을 드러내지는 않으련만.”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한 제 이야기가 영 자신이 없었는데 그런 자의식에서 추사의 글을 읽으니 그렇게 엉뚱하게 끊어 읽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앞의 글이 더더욱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참 모르겠습니다. 서둘러 다 지워야 할 것 같은데 왠지 그래도 나 나름대로 하노라고 한 말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이미 한 발언이 아깝기도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심은 자기의 치부를 가리는 일조차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곳만은 반드시 지워야 하겠습니다. ‘술 못 마시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그것도 ‘인권의 자리’에서 부디 가져주십사는 투로 부탁한 것만은 거두어드리겠습니다. 다른 소수자는 몰라도 술을 마시지 못하는 소수자는 ‘못나 소수자일 수밖에 없어 소수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마도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고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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