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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20호-“멀고도 가까운 것, 지옥”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3. 8. 19:48

“멀고도 가까운 것, 지옥”


news letter No.720 2022/3/8

셀바스티앙 살가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는 오늘날의 지옥은 전쟁이고, 그 전쟁은 멀고도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한다(가토 슈이치, 『언어와 탱크를 응시하며』). 그는 자신이 겪은 태평양전쟁을 떠올리면서, 전쟁이란 모름지기 상상과 일상의 밖에서 배회하다가 우리를 급습하여 삶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태평양전쟁의 참상을 압도할 만한 핵전쟁이 동아시아에서 벌어질 가능성을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일본사회에서 반전반핵평화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볼 때, 전쟁은 인간의 삶에 상존한다. 그렇지만 전쟁의 상존성은 전쟁이 인간의 상상과 일상의 바깥에 위치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폭력)이 인간(국가/집단)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구성되는, 인간에 내재하는 폭력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가토 슈이치의 말에 어줍은 살을 덧붙이자면, 전쟁은 ‘아직 아님’의 시간성으로 우리 곁에 있다고나 할까. 아직 전쟁(폭력)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전쟁(폭력)은 일어날 수 있기에 그것의 존재는 더욱 사악하다.

전쟁이 아직은 멀리 있다고 생각되던 사회 분위기를 가토 슈이치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히비야공회당에서는 독일계 유대인 음악가가 피아노를 치고 관현악단을 지휘했으며, 그 음악회에 다녀오는 길에 히비야 공원의 울창한 나무그늘 아래를 긴자 방면으로 걷노라면 귀에는 아직도 쇼팽과 브람스의 마지막 화음이 울렸고, 지나가는 젊은 아가씨들이 모두 아름답게만 보였다.......그러나 태평양전쟁은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우리의 잠 속으로 들이닥쳤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사건으로서 아마도 나 자신을 포함해 수백만 일본인의 죽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을 일의 시작으로서. 그것이 아무리 나로부터 멀어 보이고 아무리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더라도 그런 느낌은 전쟁이 일어나고 안 나고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어느 순간에 전쟁과 연루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그 자신이 죽이는 자와 죽게 되는 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 존재하게 되고 폭력과 파괴의 현실 앞에서 국가, 민족, 정의, 평화, 해방 등의 단어들은 말의 정의에서 풀려나 화염 속에 휘발되어 혼란을 가중한다. 자국을 위협하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타지의 억압받는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 신나치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다른 국가의 영토를 침범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는 어디에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그러한 말들이 허울뿐인 명분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폭격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자국의 여론과 정보를 통제하는 푸틴과 러시아 정부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권의 확보이지, 그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비참히 사라지는 생명들이 아니다. 어차피 이 전쟁의 실재도 문화적 장치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편집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재현될 테니.

베트남계 미국인 문학가 비엣 타인 응우엔은 베트남의 전쟁기억이 주체와 기억산업 장치에 따라서 어떻게 변형되고 고착되는지를 다룬 그의 책,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베트남과 전쟁의 기억』에서 이렇게 말한다. “살인은 강자의 무기이다. 반대로 죽음은 약자의 무기이다. 약자는 살해할 능력이 없다. 약자의 가장 큰 힘은 강자들보다 더 많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자의 관점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속해서 그는 사망자의 숫자를 언급한다. 미국 5만 8천 명 정도, 한국 5천 명 정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400만 명 정도. 전쟁기계에게 ‘소비되는’ 목숨-생명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의 본질은 목표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도라도 감행하는 데 있다. 설령 전쟁의 정당성과 부당함에 대한 지루한 논쟁이 표면적으로 일어난다 해도, 그러한 논란은 전쟁 이후에 진행되는 문화적·경제적 힘의 크기에 제약을 받는 비대칭적인 전쟁기억으로 편성되고 전승되기 때문에 전쟁기계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응우엔은 이렇게 말한다. “저예산 여정으로 짜여진 관광의 현장에서, 관객은 갑자기 약점을 찔리듯, 그 지역의 관점으로 역사를 보게 된다. 그러나 기억에 관련된 대부분의 산업이 전쟁과 그 이후의 삶으로 주의를 돌려버리듯이 약소국은 강대국이 만들어 놓음 감정의 목록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공포와 영웅주의가 교대로 나타나고, 그 중간에 있는 목록은 슬픔으로 채운다.”

수전 손택은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아니다.”는 말과 함께,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부연한다(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손택의 눈에, 나는 여전히 미숙한 존재다. 마당 한 구석 자리한 매화가 곱게 꽃망울을 피운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예년과 같은 정취를 느끼기 어렵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우크라이나 소식을 찾아본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슬픔과 그 지옥의 불길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사고와 시스템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을 이야기하면서 노다 히데키(野田秀樹)가 연출한 『파이퍼』의 줄거리를 소개한다(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 인간에게 행복을 제공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파이퍼라는 기계는 행복을 파괴하는 폭력을 파이프로 빨아들여 무력화하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화성으로 이민을 실행한다. 그러나 수백 년 후에 신세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고 판단되자 파이퍼는 화성으로 이민을 개시한 시점으로 상황을 되돌리기로 작정한다. “파이퍼는 인간이 화성에서 휘두르던 거대한 힘을 빨아들여 모아놓고, 바로 그 힘을 이용해 화성을 파괴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들은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원래의 화성으로 되돌리고 있을 뿐이지요.” 이 글에서 드는 의문은 어떻게 인간의 행복을 위한 자신의 파괴 행위에서 파이퍼가 아무런 모순을 인식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파이퍼라는 기계와 자국(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그 나머지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전쟁기계가 자꾸 중첩되어 읽힌다. 동시에 행복이나 평화라는 말로써 권력을 소유한 자들(전쟁기계)이 가리키는 그 지점에서 불행과 폭력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함께, 그렇다면 누군가의 힘(권력)에 의해서만 지탱되는 이 행복과 평화는 ‘이미’ 지옥의 문전에 나를 세우는 사악한 위장막에 불과하다는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가라앉은 마음으로 봄을 맞게 하는 이 현실이 몹시 원망스럽다. 그러한 기분 탓일까, 손택의 말에 시비를 걸고 싶다. “그래도 그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외쳐야하지 않나요, 함께 지옥의 문을 닫자고 말이죠!”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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