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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38호-‘다시 신(神)을 이야기함’의 의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7. 26. 18:44

‘다시 신(神)을 이야기함’의 의미

 

news letter No.738 2022/7/26

 

 



      이 글은 몇 달 전 EBS에서 정진홍 선생님의 ‘신 이야기’를 인상 깊게 시청한 후, 우리 시대에 ‘다시 신을 이야기함’의 의미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 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글은 강의 내용을 떠나 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 것에 불과함을 먼저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니체(1844-1900)는 〈즐거운 학문/과학〉(Die fröhliche Wissenschaft)(1882)에서 그토록 유명한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습니다. 이는 자신이 서있던 시대적 문제의식의 압축적 표출이었습니다. 신을 퇴거시킨 후 인간은 만물의 기준이자 지배 주체로 등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신의 죽음’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은, 신 없는 세계에 대한 단언- 특히 서구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인격신,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의 무효성에 대한 단언입니다. 특히 미국에서의 ‘신 죽음’ 논의는 인간 존재의 대극인 초월적 신이라는 문자적 의미에 고착되어 논의된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니체는 그가 처한 서구 문화권의 한계 속에서 발언했습니다. 그의 글에서는 그리스도 교회가 곧 신의 죽음을 드러내는 무덤으로 비유됩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은 그리스도교의 신만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신에 수많은 의미화의 가능성을 함축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신은 잘 알려진 바처럼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적으로 상정되어 온 존재의 근거, 최고의 진리, 가치를 뜻합니다. 또한 신의 죽음은 근대 과학, 학문의 절대적 진리의 가능성에 대한 죽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이란 화두는 인간 문제, 인간 이야기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의 글에서 사람들에게 신의 죽음과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인간 문제를 이야기하는 주인공, 광인(der tolle Mensch)은 광인의 의미 이상을 가리킵니다. ‘toll’이라는 형용사에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굉장하다’, ‘놀랍다’라는 형용사적 술어로 빈번히 사용됩니다. 사용 맥락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일 수도,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미친 인간은 굉장하고 깜짝 놀랄 만한 능력을 지닌 인간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그렇듯 인간이 말하는 ‘신 이야기’는 곧 ‘인간 이야기’입니다.

    막스 베버(1864-1920)는 니체와 20년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당대 지식인들처럼 니체로부터 많은 영감을 끌어안았습니다. 이들은 근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공유한 동시대인이었습니다. 니체와 베버는 근대에 흡수되지 않고 경계에 서서 근대로의 이행상황에 대한 관찰자, 고발자로 남고 싶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근대적 학문성/과학성을 비판하며 당대 사회, 경제, 정치, 문화에 대한 일종의 차가운 보고서를 남겼습니다. 근대사회에서 결코 봉합되지 않는 문제를 짚어내고, 근대인들이 그 문제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해서도 진단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에 매몰되지도 않았으며 당대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과거를 이해해 가면서 당대를 진단하고자 애쓴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들 사유의 결실을 천재성 덕택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간단한 처리 방식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혁명, 전쟁 등의 극심한 혼란과 급격한 자본주의화, 산업화의 격동 속에 서 있었으며 모두 심신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전근대와 근대의 모든 격동을 누구보다도 더 예민하게 감각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더 나아가 이들이 근대 학술 시스템의 전형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덕택일 수도 있겠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베버의 테제, ‘탈주술화된 세계’는 니체의 ‘신의 죽음’처럼 근대세계를 단적으로 요약한 표현입니다. 현재에도 이는 종교성으로부터 탈피한 근대를 선언하는 방식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베버는 이 표현을 뮌헨 대학에서 학생들을 향해 근대학문/과학의 성격에 대해 강연한 〈직업으로서의 학문(소명으로서의 과학)〉(Wissenschaft als Beruf)(1917/1919)에서도 재차 사용했습니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인은 기술적 수단과 계산을 통해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합니다. 주술적 수단을 통해 정령을 조정하거나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소위 미개인들의 몫입니다. 학문/과학은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줄 뿐입니다. 오직 객관적 서술에 충실해야만 비로소 학문/과학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학문/과학의 의미는 자연과 삶을 기술적으로 ‘지배’하는 것에 한정됩니다. 근대인은 학문/과학을 통해서는 삶과 세계에 관련한 가치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베버는 학문/과학에 기반을 둔 기술을 숭배하며 기술을 통해 지배하는 삶을 행복으로 인정하며 안주하는 인간들을 ‘최후의 인간’(마지막 단계의 인간)에 빗댑니다. 이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에 대한 비판과 공명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5/1920)에서 언급한 ‘최후의 인간들’에 대한 비판과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베버는 어떠한 종교적, 윤리적 의미도 인정되지 않는 직업 수행, 영리 추구 행위를 긍정하는 자본주의가 공고화되는 상태를 ‘기계화된 화석화’라고 칭합니다. 기계화된 화석화 단계에 속한, 최후 단계의 인간은 자신들이 영리하며 훌륭하다고 믿지만 사실 무가치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영혼/정신없는 직업인, 가슴/마음 없는 향락인(Ein Berufsmensch ohne Geist, Genussmensch ohne Herz) - 이 무가치한 것들은 자신들이 천지만물의 정점(만물의 영장)이라고 착각합니다.”

     근대인과 그들의 학문/과학에 대한 비판 속에서 베버는 ‘가치 다신론(다신교)’(Polytheismus der Werte)을 언급합니다. 탈주술화된 근대 세계 속에서 수많은 가치들의 투쟁에 관한 요약적 표현입니다. 이 ‘다신론’이라는 표현을 ‘다원론/다원주의’(pluralism)와 동의어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그가 ‘다신론’이라는 종교적 표현을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다신론은 서구의 역사 속에서 그 개념적 의미가 매우 다양하게 변화해왔습니다. 다신론은 우상숭배와 동의어로 쓰였던 적도 있으며 자연사적 관점에서 종교의 발전, 진화, 퇴화 모델의 한 단계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다신론은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벗어나 이교도들의 고유한 가치와 덕을 인정하는 관점에서 쓰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신론을 닫힌 모델로, 다신론을 종교적 다원성과 개방성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점차 정치적인 의미로 확장되어서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권력 분립의 의미로 이 개념이 활용되는 것은 니체의 관점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베버는 니체와 같이, 다신론을 억압했던 유대그리스도교의 일신론적 배타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명확히 표현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가치 다신론’에서 ‘다신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언급 속에서의 다신론을 말합니다. 베버는 밀의 공리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밀의 표현, “만일 우리가 순수한 경험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다신론에 도달할 것이다”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며 적극 동의를 표합니다. 근대성 성찰의 맥락에서 등장한 다신론에 대한 여러 해석 중, 베버의 다신론은 다원적 가치 속에서 살아가지만 각각이 처한 상황 속에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근대인의 운명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다원적 가치를 존중하고 그것을 다 이해한다 하더라도, 삶의 현장에서는 더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선한지 악한지, 신적인지 악마적인지 결단을 내리는 상황, 더 나아가 외압이나 상황에 떠밀려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더 심각하고 심오한 삶의 현장성은 변화무쌍하며 무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 우리는 늘 봉착하게 됩니다.

     근대 세계에서는 일신론이 퇴장하고 일신론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다신론이 다시금 세계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와 달리 탈주술화되어 신성의 옷을 벗어버린 모습의 다신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가치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가치 다신론이 도래했더라도, 과거처럼 서로 다른 신들을 성스럽게 여기고 공존을 허락하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자기가 선택하고 믿는 일상의 신념을 유일한 가치로 등극시키려 합니다. 일상의 삶,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의 다양한 가치들과 학문/과학 분과도 각각 자신의 성을 쌓아 난립할 뿐 상호 소통할 생각이 없습니다. 베버는 이러한 가치 갈등의 상황을 신들의 전쟁 상황으로 표현했습니다. 가치 다신론 시대에는 서로를 용인하지 않는 가치관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합니다. 여기에는 베버가 깊이 숙고했던 니체적 의미의 신의 죽음과 신을 자처하는 인간들, 즉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의 다툼에 대한 깊은 탄식이 담겨있습니다. 이 탄식에는 유일신에로의 귀환이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매우 인간적이자 신적 속성을 동시에 지닌 다양한 신들의 향연에 대한 그리움은 녹아있지 않습니다. 어떠한 신에도 호소할 수 없이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근대인으로서의 자각이 짙게 배어있을 뿐입니다. 근대인의 숙명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상을 감내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탈주술화된 근대세계의 ‘종교적 일상’입니다.

     근대 학문/과학의 지배 하에서 ‘신 이야기’는 가치 없는 발언으로 취급됩니다. 차라리 도킨스류의 전투적 무신론이라면 좀 어울린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독단적 배타적인 교조적 유신론은 학문/과학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피하고픈 이야기 거리입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매우 위험한 일들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니체를 거친 베버의 근대성에 관한 렌즈를 빌려 ‘신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게 실천적 삶의 영역에서의 가치판단 문제는 베버의 지적처럼 정말 신들의 전쟁과 같습니다. 권력을 쥔 이들은 작거나 큰 신으로 이 전쟁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그 전쟁터에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 교적 층위와 온갖 요인들이 뒤얽혀있고 무엇보다도 인간 안팎의 힘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습니다.

     잠시 니체와 베버와 같은 서구 저자들의 발언을 한 편으로 밀어둔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삶 속에서 어떠한 신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지 자문해볼 수 있겠습니다. 특정 종교의 교리적 신앙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신, 신적 존재가 아닌,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가 말하는 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좋다고, 옳다고, 완벽하다고 여기는지,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변치 않는 절대적 존재나 가치가 있지 않을까 희망하는 순간이 간혹 있지는 않은지, 혹은 세상에서 믿어지는 어떠한 신이나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고픈 때가 있지 않은지...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가치/신/절대가치/절대자를 상상하고 만들어내며 또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유신론, 무신론, 일신론, 다신론, 범신론, 범재신론, 택일신론 등등, 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가능합니다. 인간이 자신과 철저히 다른 신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는 일종의 불가능한 시도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우리들 자신, 인간에 대한 신 이야기로 되새김질 되어야 할 필요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신’과 ‘신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적 신학이나 종학, 특정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 되물어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성찰임은 물론 근본적으로는 가치관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나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비인간도 포함한 -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태연_
숭실대학교 조교수
논문으로는 <핵개발담론의 종교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 <코로나 시대, 서구 위기담론에서 드러난 근대국가와 종교문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적 관점에서>, <서구의 자기반성으로서의 종교: 타우베스의 정치신학적 《리바이어던》 해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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