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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44호-이런 행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9. 13. 17:05

이런 행복


news letter No.744 2022/9/13

 

      

      저는 사회복지기관을, 이를 운영하는 분들을, 무척 경멸하는 ‘생리화된 불신’을 지니고 삽니다. 저는 그분들이, 그런 기관이(사람들은 ‘기관’이라고 하지 않고 ‘시설(施設)’이라고 하죠. 기묘한 언어유희입니다. 저는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경멸합니다. 지금도요.) 없었다면 지금 내가 있을 턱이 없는데도 그러합니다. 슬픈 역설입니다.

    그런데 제 이런 트라우마를 상당히 가시게 해준 몇 분이 계십니다. 그중 한 분이 김옥라 (金玉羅)선생님이십니다. 그분의 생애는 인터넷 인물란에 자상하게 나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드러난 이력으로 보면 무척 화려한데, 그 화려함이 어쩌면 그대로 ‘순수와 정직과 성실’로 빚어진 거라고 해야 할는지요. 옆에서 뵌 그분의 삶은 그랬습니다. 그분의 부탁으로 1993년, 죽음을 주제로 한 강연을 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 저의 <만남. 죽음과의 만남>입니다. 그분과의 교분을 쌓은 게 30년 가까이 됩니다.

     작년에 낙상을 하셔서 한 달 동안 병석에 계시다 103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지난 8월 말일에 1주기를 맞았습니다. 그때 제가 추모식에서 추도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이런저런 모임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참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추모사를 하면서도 참 행복했습니다. 드문 경험입니다. 추모사를 드릴 수 있는 분이 내게 계시다는 행복, 그리고 이런 내용의 추모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행복이라고 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왠지 저의 이런 행복을 여러 사람과 같이 누렸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짓인 줄 잘 알지만, 독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그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저의 추모사를 이렇게 드러냅니다.

 


  추모사

 김옥라 선생님.

 선생님 떠나신지 벌써 한 해가 되었습니다. 그곳 삶은 어떠신지요. 여기서처럼 너무 바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기야 하나님께서 벌써 어떤 일을 맡겨주셨을 게 분명하니 한가할 틈은 없으시겠지만요.

 며칠 전에 선생님도 잘 아시는 쉘 실버슈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를 읽었습니다. “아이를 사랑한 나무, 나무를 사랑한 아이”의 이야기죠. 50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 감동이 여전했습니다. 그런데 좀 달랐습니다. 그때는 나무가 내 어머님과 겹쳤는데 이번에는 그 감동이 선생님과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이였고, 선생님은 나무”이시지 않았나, “우리는 아이였고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거목”이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선생님 아래서 나뭇잎을 따 모으기도 하고, 가지를 휘어잡고 그네를 타기도 했습니다. 나무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피곤하면 나무그늘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는 열매를 다 따가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몽땅 잘라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둥치를 베어 멀리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둥치조차 없는 그 나무의 그루터기에 앉아 편히 쉽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계셨고 우리는 또 그렇게 지냈습니다. 마냥 행복하게요.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한 장면이 새삼스레 저를 흔들었습니다. 장년이 된 아이가 둥치를 잘라 멀리 떠났을 때, 처음으로 작가는 나무의 속마음을 전합니다. 이렇게요. “And the tree was happy.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행복했다. but not really. 그러나 정말로 그렇지는 않았다.” 아팠던 거죠. 주는 나무도 아팠던 때가 있었습니다.

 김옥라 선생님.

 어쩌면 우리는 선생님의 ‘큰 나무이심’만을 누렸지, 선생님께서 작은 씨앗에서 비롯하여 그렇게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윽고 ‘주는 나무’가 되기까지를 헤아린 적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바람이 치면 홀로 얼마나 힘드셨을까, 밤이 깊어 어둠이 짙으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한데 覺堂(그분의 남편)이 옆에 계셔서 얼마나 든든하셨을까. 그러다 그가 떠나고 난 뒤...이런 것들을요.

 아무래도 오늘 저는 선생님께 사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무를, 나무의 마음을 넉넉히 헤아리지 못한 철없음을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고 보니 분명한 것은 나도 우리도 모두 한그루 나무인데, 그리고 이제는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데, 내가, 우리가, 선생님 같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온갖 것 다 견디면서 ‘주는 삶을 사는 나무’, 선생님 같은 나무가요. 그런 흉내라도 내고 싶습니다.

 이 마음을 다지는 것으로 저의 그리운 마음을 삼가 선생님께 아룁니다.

                                                                                                                                              2022년 8월 30일 정진홍 올림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고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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