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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42호-명분(名分)이라는 말에 대한 잡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2. 8. 30. 18:53

명분(名分)이라는 말에 대한 잡념


news letter No.742 2022/8/30

 



      조선의 노예제를 유지하게 했던 유교 지식인들의 명분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것저것 읽고 생각하던 중에, 그 명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명분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18세기, 특히 영ㆍ정조 시기에 조선의 신분제는 크게 동요되었고 그 중심에는 노비제의 문제가 있었는데, 영ㆍ정조 모두 노비제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다방면으로 기울였다. 이는 노비의 인권에 눈을 떠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기존의 노비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양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병사나 곡식을 얻기 위한 노비 면천이 허락되면서 점차 신분적 제약은 허물어졌고, 국가는 더 이상 노비 통제를 위한 공권력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갔다. 따라서 영ㆍ정조 시기를 통하여 공노비와 사노비의 신공(身貢)을 모두 없애고 노비추쇄관을 혁파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전국적으로 관철되지 않았다. 또한 도망이나 은루(隱漏)로 인하여 노비수가 급속히 감소하자, 노비제 자체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결국 정조 시기의 위정자들은 양역과 노비의 신공에 차이가 없으므로 노비라는 명칭을 없애고 이들을 양인화하면 노비라는 신분 차별로 인한 도루(逃漏)가 사라질 테고 재정에 보탬이 되리라는 이유로 내시노비(內寺奴婢)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몇 차례 이루어졌다.1) 여러 차례 거론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려주는데, ‘명분론’은 개혁을 반대하던 자들의 가장 큰 이유였다. 정조 자신은 노비제를 혁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역시 ‘명분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존재가 노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기자의 팔조지교는
    그것이 악을 징계하자는 일시적 조처에 불과했던 것인데, 역대로 그것을 변혁하지 않고 그대로
    인습해 왔기 때문에 대를 물려 가면서 남의 천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홍재전서>> 제12권 <노비인(奴婢引)>]2)

    노비가 갑자기 억울해진 것도 아니고 남들의 천대와 멸시가 이때 더 심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이 문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정조는 노비제 자체의 오류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는 “노비 규정을 모조리 없애고 이를 대신하여 고용(雇傭)의 법을 만들어 세습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고심하였지만, 결국 “우리나라는 ‘명분’을 숭상하는데 만약 양반과 천민을 뒤섞어서 반벌(班閥)이 분명하지 못하면, 상대를 무시하고 덤빌 자가 틀림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3)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서거 다음 해인 순조 1년(1801), 소위 ‘노비윤음’이 반포되면서 내시노비는 혁파되었지만, 재위 기간 중 노비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무던히 고심했던 정조는 결국 ‘명분’이 유지되지 않으면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리라 여겼기에 내딛어야 할 걸음을 주저하였다.4) 조선의 유자들에게 명분(名分)이란 명분(命分), 즉 운명(運命)과도 같은 의미가 아니었을까? 조선에서 노비세습제가 폐지된 것은 1886년이니, 19세기 말까지도 노비라는 명분(名分)은 명분(命分)과 다름없었던 셈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며, 바뀔 수 없고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명분’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공자의 ‘정명(正名)’으로 그 원류를 찾아들어가곤 하지만, 이는 명분이라는 것이 유가의 사상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先秦) 시대의 제자백가 사상가들은 유가ㆍ법가ㆍ도가ㆍ명가 할 것 없이 명(名)과 분(分)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나아가 ‘명분(名分)’이라는 용어는 <<논어>>ㆍ<<맹자>>ㆍ<<순자>>에는 보이지 않는 반면, <<관자>>ㆍ<<상군서>>ㆍ<<장자>> 등의 법가나 도가서, 그밖에 <<한서>><예문지>에서 잡가(雜家)로 분류되었던 <<시자>>나 <<여씨춘추>> 등에 두루 나타난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전국 중후기 이후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들의 혼합적 사상 체계인 황로학(黃老學) 에 속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물론 ‘분(分)’이라는 한 글자로 ‘명분(名分)’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에 ‘명분(名分)’이라는 용어의 유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때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한 무제의 부친인 경제(景帝)의 면전에서 벌였던 원고생(轅固生)과 황생(黃生)의 탕ㆍ무 혁명에 대한 논쟁이다. 황생이 “탕왕과 무왕은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군주를 시해한 것”이라고 하자, 원고생은 <<맹자>>에 나오는 탕ㆍ무 수명설을 반복하면서 “걸왕과 주왕의 백성들이 탕왕과 무왕에게 귀속하여 천하의 인심과 더불어 걸왕과 주왕을 치고 하는 수 없이 즉위한 것이니 이야말로 천명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반박하였다. 이에 황생은 “관은 헤졌더라도 머리에 써야 하고, 신발은 새 것이어도 발에 걸치는 것”이라는 말을 들면서 탕ㆍ무는 걸ㆍ주를 주살한 것이라고 다시 주장하였고, 원고생은 “그렇다면 한 고조께서 진나라를 대신하여 천자의 지위에 오른 것도 부당한 것이냐”고 재차 몰아부쳤다. 원고생은 <<시(경)>>을 전공했던 제나라 출신의 박사였고 황생은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에게 도론(道論)을 가르쳐 주었다고 전해지는 황로학자였다. 유가의 정치적 이념을 수용해가던 상황에서 경제는 황제의 지위를 확고히 해준다고 하여 황생의 편을 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언제든 혁명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유자 원고생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경제는 “고기를 먹으면서 말의 간을 안 먹었다고 해서 고기 맛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학문을 논하는 자가 탕ㆍ무의 천명을 논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로 더 이상 천명과 시해에 대한 논쟁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실상 한 제국 초기에 황로학은 한 조정을 풍미하며 유가보다 우세를 차지하였으며, 이 황로학을 흡수한 유교가 제국의 지배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명분론 본래의 난점을 잘 보여준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게 되면 군주의 ‘분(分)’을 지키지 못했으니 군주라는 ‘명(名)’도 확보하지 못하므로 이를 바꿀 수 있다는 명분론의 입장(A)이 있는가 하면, 군주라는 ‘명(名)’은 불변의 것이므로 그에 따른 ‘분(分)’이 적절하지 않다면 이를 조정해야지, 분으로 인하여 명이 달라질 수는 없다는 입장(B)이 있다. 유교문화권에서 대부분의 왕조는 A로부터 B로 나아가다가 사라지는 양상을 반복했을 것이며, 조선 후기는 B의 진행이 막바지로 나아가는 중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다시 조선의 노비제 문제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노비제의 수많은 폐단으로 온 나라가 곪아터져도 ‘노비’라는 명분 하나를 없애기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조선은 주자학 때문에 강상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명분론이 강력하게 작용했다고 이해하곤 하였다. 그러나 사실 북송의 천재적인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사마광이 앞에서 보았던 황생과 같이 군신 사이의 의리를 강조하면서 맹자를 비판하였던 것과는 달리, 주희는 ‘시조(時措)의 적절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인의(仁義)에 따른 수명(受命)’을 긍정하면서 맹자를 변호하였다. 조선에서 명분론 및 그 연장선상에 있는 강상론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결국 주자학 때문이 아니라 ‘시의’의 적절함이나 ‘인의’로써 백성들을 수화(水火)에서 구해야 한다는 주희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결국 형식적이나마 모든 노비의 명목이 사라지는 것은 갑오경장(1894)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는 온전히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명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명분을 찾아 내세우는 것이 자신의 언행을 정당화하고 또한 타인들의 인정을 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라면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물론 명분이라는 것을 찾을 필요조차 없이 나의 진정성이 그대로 드러나도 아무런 거리낌이나 무리나 물의도 없다면[從心所欲不踰矩] 더 좋겠지만 말이다. 최근 오다가다 들은 어떤 뉴스에서 ‘신군부’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었는데, 아마도 이는 자신을 합리화할 필요나 타인들의 인정을 받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아무 거리낌 없이 불인과 불의를 저지른다는 뜻[從心所欲每踰矩]으로 쓰인 듯하니, 명분조차 찾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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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조의 재위 기간 내내 노비제 개혁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논의의 계기는 달랐으나 찬반 양쪽의 주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에 관해서는 김성윤의 논문 <정조대의 토지제, 노비제 개혁논의와 정치권>(<<지역과 역사>> 제3호, 1997)을 참고할 수 있다.

2) 한국고전종합DB에 실린 <<홍재전서>>의 번역문을 인용하였다.

3) 따옴표 안의 인용처는 위와 같으며, 몇 글자만 수정하였다. 편의상 <노비인>을 인용하였으나 정조실록에는 노비제에 관한 상소, 서계, 비답 등 수많은 기록이 있다.

4)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어미는 남의 부림을 받는데 자식은 도리어 주인에게 항거한다거나, 작은 역(驛)과 보(堡)에 부릴 하인이 없다거나, 궁한 선비 집에 땔감을 마련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 가지 폐단은 없어지지만 한 가지 폐단이 다시 생길 염려가 있으므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것”라는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연승_
서울대학교 교수
논문으로〈서구의 유교종교론〉, 〈이병헌의 유교론: 비미신적인 신묘한 종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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