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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80호-버킷 리스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5. 30. 18:39

버킷 리스트

 

 news letter No.780 2023/5/30

 


   ‘버킷 리스트(bucket list)’란 말이 이제는 낯설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또 그렇게 이 말을 사용하니까요. 그런데 그 말이 비롯한 본디 정황은 아주 고약하더군요. 물통에 올라 목을 매고 발로 그 통을 차버리는 데서 말미암은 거라니 예사롭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할 일이 뭐야?” 하는 거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너를 죽일 텐데 그 전에 하고 싶은 거 있어? 말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너 죽기 전에 내가 하도록 해줄 께!”하는 말이나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 말을 국어연구원에서는 ‘소망목록’이라고 순화(淳化)해 표현하도록 했다는군요.
          우리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의도할 때 흔히 어원론(etymology)에 상당한 무게를 둡니다. 특정한 언어란 그것을 출현하도록 한 경험을 담고 있으니까 그 언어로 기술되거나 묘사되는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어원을 살펴야 한다는 거죠. 그러나 ‘버킷 리스트’와 ‘소망목록’의 간극이 보여주듯 특정한 용어의 지금여기에서의 일상적인 용례를 어원론을 좇아 ‘분명하게’ 한다는 것은 자칫 ‘방법론적’으로 적합성을 지지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게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아닙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요즘 제가 집사람 등쌀에 밀려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에서 느낀 이런저런 것을 이 글에 담으려다 엉뚱한 데로 그만 말이 빠졌습니다.

    자식과는 참 오랜만에, 손자와는 처음으로, 제가 자란 고향에 갔습니다. 폐허가 된, 여기가 내가 자란 집이 있던 터임을 보여주는 뒷동산 몇 그루 소나무가 없었다면 여기를 여기로 확인하지조차 못했을 잡초 무성한 넓은 빈터에서 저는 무상함을 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틈에 큰댁 솟을대문으로 들어가 사랑채를 지나 안마당을 거처 높은 댓돌 위에 자리 잡은 안채의 넓은 마루 위에 올라섰습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벌떡 누웠습니다. 모든 것이 온전하게 있었습니다. 저는 생생하게 그때 거기를 그대로 겪고 있었습니다. 폐허가 아니었습니다. 없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비롯한 여든 해 여정을 그대로 몸으로 느끼면서 저는 그렇게 지난 세월을 천천히 숨 쉬며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제 과거는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지나가질 않았으니까요.
          자식이 “이제 가실까요?”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멍하니 서있다고 느꼈겠죠. 그 순간 저는 갑자기 ‘지금여기’가 견딜 수 없이 낯설었습니다. 있지 말아야 할 때와 장소에 있는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저녁에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살았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손자는 “잘 상상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제 과거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로지 상상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세대와 공존한다는 것이 사뭇 안개 속 같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구체적으로 제 경험을 설명한다 해도 손자에게는, 그리고 자식에게도, 그것은 ‘사실’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굳이 ‘사실’이란 말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의해 구축된 ‘상상의 실재로서의 사실’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경험된 사실’과 ‘상상된 사실’로 나누어 지닌 채 현재 안에서 더불어 그 ‘사실’을 공유하면서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공유’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하나’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제각기 나름대로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이게 되는 계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된 사실’을 발언하는 주체가 소멸하면, 제가 죽으면, 남은 제 아이들은 저의 ‘경험된 사실’조차 자기네의 ‘상상된 사실’ 안에 담으면서 그것이 곧 ‘사실’임을 주장하게 될 거니까요.
          역사란 그런 것 아닐는지요. 경험주체의 무수한 생성과 소멸, 그리고 상상주체의 마찬가지로 숱한 출현과 소멸, 그런 것을 겪으면서 그 역설적인 주체의 동거가 이루는 현재라는 것을 여전히 경험과 상상을 준거로 인식하려는 거요. 그게 역사를 운위하는 기저(基底)이지 않을는지요. 그런데 그러고 보면 인식의 파열은 불가피합니다. 경험적 실재와 상상적 실재는 다른데 이를 한데 버무려 알려 하니까요. 이 난제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는지요. 어쩌면 방법은 하나일지 모릅니다. 경험주체는 어차피 상상주체의 소멸 이전에 소멸할 숙명을 지녔습니다. 그렇다면 상상과 경험의 일치나 괴리를 불편해하기보다 경험주체가 아예 상상주체에다 “마음대로 보렴, 네 좋을 대로!”라고 말하는 것이 ‘예(禮)’가 아닐는지요. 그러나 이런 아쉬움도 실은 추레한 모습입니다. 이미 그렇게 ‘마음대로’ 인식은 이뤄지고 있으니까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 의해서나요. 그래서 손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 이야기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면 그저 네 마음대로 상상하면 돼!” 그러나 그렇게 실제로 발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잡아끄는 어떤 기억이 회상되어서요.

       아주 오래전에 몽골에 간 적이 있습니다. 편하게 꽤 오래 묵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어서 나름대로 몽골을 알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미리 Jasper Becker의The Lost Country: Mongolia Revealed(Sceptre. 1992)를 읽었습니다. 몽골인의 저술은 쉽게 구할 수 없더군요. 저자는 몽골 전문가가 아닙니다. The Guardian의 기자입니다(북한에도 다녀왔고요). 그래서 물음이 참신하고, 관찰이 생동적이고, 문장이 재미있습니다. 몽골을 7회나 방문하고 썼으니 우선 그의 몽골에 대한 ‘지식’을 신뢰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7장 The Shamans에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베커가 묻습니다. “왜 몽골인은 물고기와 날짐승을 먹지 않습니까?” 통역을 통한 샤만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망자의 몸이 상하기 전에 서둘러 새 몸을 지니게 하려면 죽은 몸을 어서 치워야 합니다. 그런데 물고기나 새가 시체를 가장 잘 먹어 치우죠. 그래서 사람들이 물고기나 새를 먹지 않습니다.” 이를 듣고 베커는 무척 송구해 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가 물고기를 잡아 요리해 먹었군요.”
          몽골 관리를 만났을 때 제가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련에서 대학을 나온 그의 반응이 흥미로웠습니다. “베커는 자기가 물고기나 날짐승을 늘 먹으니까 그런 질문을 했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대체로 먹지 않으니까 아예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샤만이 했다는 대답은 저한테도 낯섭니다. 별로 보편적이지 않은 생각이죠. 이방인들이 와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면 토착민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그 사람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해야 자기도 어떤 형태로든 득을 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죠. 그 샤만의 대답은 바로 그 전형적인 거죠. 통역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저는 이를테면 인류학자들의 ‘현지조사’가 그런 ‘술수’에 넘어갈 만큼 소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물음’입니다. 베커는 대답을 얻을 수 없는 물음을 물은 것이고, 샤만은 물음일 수 없는 물음에 대답해야 했던 거죠. 우리는 이런 틀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듭니다. 자기가 어떤 틀에 갇혀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대로 상상하면 돼!”를 발언하지 못한 것은 이런 일이 생각나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저에게는 손자에게 ‘상상의 자유’를 누리도록 하라는 발언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자유를 주고 ‘떠나야’ 하는데요.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소리, The Visible Sounds>라는 전시회에 들렸습니다. 각기 다른 다섯 작가의 5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충격이라기보다 아예 감동이었습니다. 팸플릿에 담긴 다음의 내용을 읽으면서(제가 재기술한 것임) 제 ‘경험’을 마음껏 ‘상상’해보면 어떨지요.

“인지감각에 대한 의문과 잠재되어 있는 감각영역의 확장을 탐구하는 작품 〈가상소리 프로젝트〉는 어항 속 물고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하고, 이를 소리로 반영하여 만들어진 이미지를 투사한다. 이를 통해 물리적 움직임과 가상의 소리를 병합하여 제시한다.”

“〈Fireworks in Underpass〉는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면 울려 퍼지는 음의 변화에 따라 빛을 발하게 한 작품이다. 기술과 미술의 조화를 작품의 중심에 놓고 조명, 음향, 영상을 이용하여 시-청-각 자극에 기반을 두고 제작한 것이다.”

“소리의 파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하고, 감상자의 움직임에 따라 그것이 변화하게 한 〈Circle Forms 05〉는 컴퓨터 미디어를 중심으로 예술과 과학의 혼합, 기계의 생명성, 공진화, 알고리즘, 인공지능 등을 소재로 만든 환경이다.”

“〈Ennio Morricone, Cinema Paradiso〉는 음악의 파장에 따라 흔들리는 꽃의 움직임을 사진을 통해 한 장의 이미지로 담아낸 것이다.”

“J.S. Bach 음악의 형식미와 아름다운 구성요소를 자신만의 ‘음악번안 시스템’을 통해 시각화하는 작가가 이번에는 그의 작품 〈낯선 전주곡 BWV851〉을 통해 서예가와 협력하여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Ⅰ권 6번 전주곡을 시각화한다.”


       제게는 온갖 ‘분류’가 다 무너지는 경험이어서,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현실화하는 것이어서, 놀라움을 넘어 감동조차 가누기 힘든데 아이들은 시큰둥했습니다. “공감각(synesthesia)은 일상이죠. 흔히 이는 모순이고 역설이라고 일컫지만 그렇지 않죠. 시(視)와 청(聽)의 교차적 대응만이 아니에요. 이를테면 ‘하늘을 듣는다. 바람을 본다. 황혼을 맡는다. 삶을 쥔다.’도 다르지 않아요. 지금 표현하신 감동이란 이런 거잖아요. 이제까지는 그럴 수 없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감탄한 거죠. 그런데 이보다 더 일상적인 ‘진술’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이런 진술보다 더 분명하게 정직한 발언이 또 어디 있어요?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상스러운 분류체계를 지니고 삶을 마찬가지로 이상하게 규정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그 작품들은 어쩌면 지나치게 진지해서 유치할 수도 있어요. 작위적이기 끝이 없는 재간을 드러내는 거니까요.”

       공연한 염려를 하는 게 늙은이의 ‘생리적 특성’이라면 저도 틀림없이 아주 많이 늙은 게 분명합니다. 이미 아이들은 제각기 상상의 자유를 이미 살고 있는데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다고 염려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래도 그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상상의 자유를 누리라는 말을요. 기회는 아직 남았습니다. 손자는 제게 종교가 무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꼭 올 것 같습니다. 그날이 오면 저는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마침내 할 겁니다. “네 마음대로 상상해!”라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첨언을 한다면 저는 “진지하게 탐구해 봐!”라든지 “비판적 인식을 통해 네 앎을 다 털어놓고 재구성해 봐!”라든지 하는 말은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물론 그러한 물음을 내게 끝내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제 버킷 리스트가 또 남아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살다가 아쉬운 소망목록이 떠오르면 이번에는 저 혼자 이를 수행해야겠습니다. 여럿이서는 사뭇 소란스러워서요. 어쩌면 황혼의 뿌리를 향한 순례가 제 마지막 ‘목록’이 될 듯하니까요.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고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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