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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거룩한 상상상식사이에서

 

news letter No.809 2023/12/19

 

 

종교, 빌런이 되다

 

벌써 2023년이 끝나가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올 한 해 역시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도처에서 많이 일어났던 것 같다. 올해 여름 미국에서 일어난 애틀랜타의 살인 사건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 글은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단상이다. “종교는 왜 상식을 벗어나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허용(혹은 양산)하는가?”라는 의문이 그 핵심이다.

 

이창동 감독의 2007년도 개봉작 밀양은 여주인공 신애 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이창동 감독에게는 각본상을 안겨주었다. 영화에서는 신애가 아이의 유괴와 죽음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종교에 귀의하며 꿋꿋하게 삶을 지탱한다. 그런 그녀의 삶이 무너져 내린 것은 유괴범이 자신은 감옥 속에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라고 신애에게 자랑삼아 말하는 것을 들은 이후이다. 피해자인 당사자가 아직 죄인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이 먼저 나서서 범인을 용서하고 그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하는가? 이것이 신애의 의문이며, 이후 그녀는 자신이 믿던 종교를 거부하고 신에게 반항한다.

 

그래도 영화에서는 비밀스러운 햇빛과도 같은 주변의 사랑의 힘으로 신애의 방황이 극복되고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암시하고 끝난다. 하지만 영화의 원작소설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1985)에서 유괴된 아이의 엄마는 절망 끝에 자살한다. 이청준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어떤 한 종교가 가지고 있는 회개와 용서의 구조가 악용될 수 있는 미묘한 지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바로 그렇다면 과연 그 시선이란 무엇일까? 다름 아닌 그것은 우리의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와 영화 등에서 재현되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이미지들이 문제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적지 않은 작품들 속에서 특정 종교가 희화화되고 심지어 악마화되고 있는 듯하다. 주로 인기리에 방영된 작품들에서 나타난 이미지들은 대중들에게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문제가 된 드라마들은 주로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것들이다. 오징어게임(2021)에서 240번 참가자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성범죄를 당한 희생자이며, 244번 참가자에게 예수는 자신의 편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구원자이다. 수리남(2022)에서 마약 밀매조직을 만들어 남미 국가 수리남을 장악한 한인 마약왕은 한인교회 목사로 설정되어 있다. 더 글로리(2022-2023), 마스크걸(2023) 등의 드라마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완고하고 독단적인 인물들로 그려져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의 기독교 폄하경향을 주목하면서 넷플릭스의 상업적·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비판하는 기사들도 다수 쏟아져 나왔다. 연예 전문 매체 텐 아시아요즘 빌런들은 다 교회 다니나? 선 넘은 넷플릭스 기독교 악용법(2023.8.29.)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넷플릭스만이 아니다. 2023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분장상을 수상한 영화 더 웨일(The whale)(2022 미국 개봉)에는 영화 미이라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가 272kg의 초고도 비만으로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인 대학교수 찰리의 딸 엘리는 8년 전 동성 애인을 위해 자신과 엄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경멸로 가득 차 있는 10대 소녀다. 매사를 삐딱하게 보는 비판적 성격이지만,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한 가닥 남은 애정과 연민으로 괴로워한다. 이 영화에서는 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주 방문하는 새생명(new life) 선교회의 젊은 선교사 토마스가 등장한다. 그에게 엘리가 던지는 대사가 예사롭지 않다.

 

“종교에서 좋은 점도 있어. 종교는 모든 사람을 바보로 가정하지.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다고. 그건 맞는 말 같아. 그런데 싫어하는 점은 예수든 뭐든 믿게 되면 갑자기 자기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자기가 멍청한 죄인이라고 시인하면서 남들보다 낫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지.”

 

물론 이 영화도 공교롭게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비판적 묘사는 이 매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찰스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A Secular Age)(2007)에서 현대사회의 세속성(secularity)종교적 믿음과 실천의 쇠퇴라기 보다는 믿음을 위한 새로운 조건의 등장으로 설명한다. ‘세속의 시대신에 대한 믿음이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으면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회로부터, 이제 그 믿음이 하나의 선택 사항(option)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믿음을 갖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회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세속의 시대에 종교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상식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비코(J. Vico)에 의하면 상식(Common sense)’이란 계급 전체, 국가 전체,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반성이 필요 없는 판단(judgement without reflection)”이다.1) 즉 상식이란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지식, 판단력”2)을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찰스 테일러가 말하는 것은 이제 서구 사회에서 기존의 종교는 모든 사람에 의해 당연하게 공유되는 상식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라는 범주 자체의 문제로 보인다.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이제 당연한 상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식으로부터 견제받고 의심되는 영역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종교가 단지 상식의 영역에 있지 않다고 인식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비상식’, 혹은 ()-상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종교적 괴물들은 누가 키웠나

 

2023914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모 종교단체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인 6명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한 30대 여성을 감금 및 살해한 피의자들로, 국내 언론들은 그들을 사이비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고 보도했다. 얼마 후 3명의 피의자의 어머니 모씨도 입건되고 함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 어머니 모씨는 한국에서 직통계시를 받고 미국으로 옮겨와 그곳에서 종교적 행위를 했으며 이 사건의 최종 배후 조종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재판 현장의 영상에서 이들 용의자의 표정에서는 어떤 죄책감이나 당혹감은커녕, 태연자약하며 미소까지 짓는 여유와 당당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위 사이비종교의 비정상적 행태를 단골 주제 중 하나로 삼는 대표적 고발 탐사보도인 그것이 알고 싶다(2018. 8. 25 방송)는 피지섬으로 신도들을 이주시켰던 모 종교집단을 다루었다. 여기서 이른바 타작마당이라는 의식이 소개되었는데, 그 가운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와 고등학생인 딸이 반복적으로 서로 뺨을 세게 때리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정당한 교리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직통계시성경의 해석에 대한 권위를 통해 상식 위에 군림하면서 신도들을 사유화하는 소위 종교적 기제가 가능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정교분리라는 현대의 제도가 오히려 사각지대를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종교와 세속을 구분하면서 정치와 법률이 종교에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고, 종교의 자유를 개인의 내면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특권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개인들의 내면을 장악한 종교 권력이 과도한 권한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상식에 어긋나는 거룩한 상상의 공동체가 가능할까?

 

이와 같은 예들은 분명히 종교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종교의 본령을 대표하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라.”, “네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라.”와 같은 가르침들은 종교가 우리 인류에게 남겨준 고귀한 가치와 교훈들이며, 우리의 상식의 세계를 넓고 깊이 있게 만들어준 것들이다. 종교는 거룩한 상상의 공동체, 혹은 거룩함을 지향하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종교하면 떠오르는 감동적 장면으로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선물하며 감싸주던 미리엘 신부, 만다라에서 어릴 때 자신을 버리고 재가한 어머니를 만나 손을 잡고 미소 지어주던 법운 스님의 얼굴 등이 있다.

 

이제 상식을 따라잡지 못하는 종교는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계속 견제받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상업적 목적을 위해 지나치게 종교를 희화화하고 왜곡시켜 표현하는 세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의 문제를 포착하고 예리하게 짚어내는 작가들이 유독 그것에 주목한 이유가 무엇인지에도 성찰이 필요하다.

 

종교들(religions)’은 이제 자신들이 상식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상상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보편적 상식이란 인류가 그동안 누적, 발전시켜온 가치의 결과물이다. 그 보편적 상식에 어긋나는 종교란 존재할 수 없다. 종교 역시 보편적 도덕률 안에서 존재하는 것일 뿐, 그것을 완전히 초월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오독(誤讀)이며, 종교는 탈 상식이자 반() 상식일 수 있다는 인식은 오만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제 종교들상식이 자신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 무엇보다도 상식의 힘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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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주_
순천향대학교 교수
논문으로 <서구 근대불교학의 출현과‘부디즘(Buddhism)’의 창안>,<한용운의 불교·종교담론에 나타난 근대사상의 수용과 재구성>,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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