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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08호-조선통신사와 절벽 위의 관음당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12. 12. 17:56

조선통신사와 절벽 위의 관음당

 

news letter No.808 2023/12/12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역사를 위한 변명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좋은 역사가는 전설 속의 오우거를 닮았다. 인간의 살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는 자기 먹이가 거기에 있음을 알고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인 오우거가 사람 냄새로 먹잇감을 찾듯이, 좋은 역사가는 산더미 같은 문헌 속에서도 인간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한 자료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종교학자의 생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얼핏 보기에 종교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자료들 속에서도 종교사적 정보의 냄새를 맡고 군침을 흘리는 포식자들이다.

 

몇 가지 계기가 겹쳐서 지난 몇 달간 조선통신사 기록을 검토하게 되었다. 기대하는 바는 단순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을 방문한 조선인들은 무엇보다 그들의 이질적인 종교문화에 반응하고 호기심 또는 오해로 가득한 기록을 남겼을 거라는 예측이었다. 냄새가 나는 곳에는 역시 먹이가 있었다. 17-18세기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은 도시 안에서 속인들과 뒤섞여 사는 승려들을 인상 깊게 관찰하는가 하면, 화려한 사찰과 신사들을 보며 일본 온 땅이 신불의 나라(神佛之國)”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개별 종교시설이나 종교적 실천에 대한 묘사도 풍부하게 발견되었다. 그들은 신사에서 모시는 신들의 목록을 작성하는가 하면, 기리시탄 금제(禁制) 하에서 왜곡된 형태로 전파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많은 통신사들이 주목한 특이한 불교 사찰에 대한 이야기이다. 쓰시마에서 에도로 향하는 경로에 있는 몇몇 주요 사찰들은 사신들의 관소(館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통신사행록들에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 절은 달랐다. 공식적인 사행 코스에 포함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통신사들이 이곳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바로 오늘날 아부토관음(阿伏兎観音)이라고 알려진 해조산 반대사(海潮山 盤臺寺).

 

시모노세키에서 효고로 향하는 항해길에서 통신사 일행은 으레 세토 내해 한가운데에 있는 이 절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곳은 해안 바위 절벽 위 좁은 공간에 세워진, 관음을 모신 암자였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선원들은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돈, , 종이, , 땔나무 등을 통에 담아서 바다로 흘려보낸다. 그러면 거기에 거주하는 두어 명의 승려들은 돌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그 공양물을 받아다가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절에 대한 기록은 17세기 초에 작성된 여러 통신사행록에서부터 보이지만, 실제로 통신사에 의한 보시가 이루어진 사실이 명시된 것은 1655년의 을미사행 기록부터다. 이때 종사관(從事官) 남용익(南龍翼)은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절벽 위의 관음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대사 안에 승려들이 신선과 같은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수행원들에게 남은 양식을 모아다 절에 보내줄 것을 지시하였다. 신심 깊은 바다 사람들이 다투어 내놓은 공양물은 쌀 4-5, 소금 3-4석에 이르렀다. 수령하러 온 승려들은 합장하며 감사를 표하고 덕담도 해주었다. 답례로 남용익은 두 자루의 부채도 선물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의 일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통신사 일행의 배가 이 절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공양물을 보내는 관행이 생긴 것이다. 1682년 통신사를 수행한 역관 홍우재(洪禹載)는 다른 일행과 함께 이 절에 쌀과 초, , 먹을 보시하며 본국에 있는 어린 손자 홍대치(洪大治)를 위한 기도문을 바치기도 하였다. 다소 씁쓸한 후일담에 의하면, 그가 귀국했을 때 손자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719년에 반대사 앞을 지나간 사신인 신유한(申維翰)의 일기를 보면, 절벽을 내려와 배를 타고 와서 공양미를 받아 가는 승려들은 초라하고 허름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사절단을 수행하는 일본 측의 승려들은 학식이 뛰어나고 지위도 높은 이들이었으나, 반대사의 승려들은 글을 모르는 자들 같았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바다 위에서 이루어지는 반대사 공양에서는 정례화와 형식화가 동반된 의례화 과정이 나타난다. 통신사 일행의 배가 가까워지면 바위 위의 암자에서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곧이어 대기하고 있던 승려가 배를 저어 온다. 공양물을 기다리는 대신 선제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구름무늬가 수 놓인 비단 가사를 입은 승려는 사신에게 흰 소반을 바친다. 그 위에는 순풍을 비는 축원문이 올려져 있다. 그러면 사신들은 전례를 참고하여 적절한 양의 공양물을 제공한다. 허름한 옷을 입고 쌀을 받아 가던 문맹 승려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물론 문장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쳤던 조선 사신들은 그 축원문이 몇 구절밖에 되지 않는데도 문리가 통하지 않았다.”고 비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교적 후대의 사행록에는 이 절과 관련된 일본인들의 속담도 소개되어 있다. 세토 내해를 오가는 선원들이 반대사에 보시하면 승려들은 순풍을 빌어준다. 그런데 그 고객들 중에는 동쪽으로 가는 이들도 있고, 서쪽으로 가는 이들도 있다. 그러니 공양을 받은 반대사의 승려들은 서풍을 빌었다가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오는 손님을 위해 동풍을 빌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일이 반쯤 잘 풀려가다가 갑자기 막히는 일이 있으면 반대사의 기풍(祈風) 같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1764년에 반대사 앞을 지나며 이 이야기를 들은 조엄(趙曮)자기 한 몸의 이익을 위해 누구에게나 좋게 좋게 대하는 이들이야말로 반대사의 중들이 바람을 구걸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라는 냉소적인 평을 남겼다.

 

아마도 이 절호의 명당에 위치한 암자에서는 조선인 사신들이 주목하기 전부터 지나가는 배들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통신사들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비단 가사를 입은 승려가 배를 타고 와 축원문을 바치는 의례화된 호객행위는 애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비교적 후대에 창안된 것이다. 또한 이곳의 승려들이 뱃사람들의 공양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는 17세기 사행록에서부터 보이지만, 그 대가로 순풍을 빌어 준다는 이야기는 18세기 중엽에야 비로소 언급된다. 혹 통신사 일행에 의한 거액의 보시 관행이 소수의 승려들이 수행하며 머물던 이 작은 암자를 기풍에 전문화된 기능적 의례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닐까?

 

 

 

 

 

 

 

한승훈_
한국학중앙연구원
최근 저작으로 〈전근대 동북아 종교 범주로서의 교(敎)〉, 〈동북아 종교지형을 읽는 눈〉, 《동북아 인물전》(공저), 《동북아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변화》(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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