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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신시개천’의 이념
-弘益民族主義와 理化民主主義-
news letter No.852 2024/10/15
개천절은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천행사와 단군사화(檀君史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개천절은 대종교(大倧敎) 창시자 홍암 나철(羅喆, 1863~1916)이 음력 1909년 1월 15일 단군 대황조신위(大皇組神位)를 모시는 제천의식[襢儀式]을 거행하고, 단군교를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다음 해 1949년 3.1절, 제헌절, 광복절과 함께 국가 법률로서 4대 경축일로 지정되었고, 2005년 한글날이 국경일로 승격되면서 대한민국 5대 국경일의 하나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1948년 9월에는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단군 기원 곧 단기(檀紀)를 나라의 공식 연호로 사용하였으나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 폐지되었다. 한민족의 생일(生日)이기도 한 개천절 행사는 한민족의 역사적 정황에 따라, 그리고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의 흐름에 따라 행사의 사회적 비중이나 내용이 많이 변화해 왔다. 단기 4357년 개천절을 맞아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어 있는,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날 조짐도 있는 지금, 민족적 차원에서 개천절 행사의 역사와 의미를 한번 쯤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같은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단군에 대한 역사 계승의식은 고려 후기 단군을 동국(東國)의 개국조로 삼은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16세기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단군보다는 기자(箕子)가 더 강조되었고, 17세기 후반 실학의 시대에 이르러 서는 자주적 역사서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조선의 유구한 역사와 독립성이 강조되면서 단군을 개국조로,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재정립하였다. 이후 서세동점의 개항기에는 단군과 민족의식이 결합하여 외세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대종교는 국망도존(國亡道存)의 기치 아래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기념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단군 탄생 이야기를 허황된 이야기로 폄하하고, 개천절을 시행하는 대종교 역시 유사종교로 규정하면서 개천절 행사를 금지시켰다. 당시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고취하는 동력(動力)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개천절 행사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신에 일제는 그러한 자신의 건국신화(《일본서기》)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 2월 11일을 건국기원절로 공식화하였다. 그런 탄압 가운데 대종교는 개천절 행사를 종교행사로 지속함으로써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 범민족적 경축일로 행사로 확대되었다.
특히,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개천절을 3.1절과 함께 국경일로 제정하여 ‘ 영파회관’, ‘상해 삼일당’과 같은 대중적 문화예술회관에서,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북경로 예배당’, ‘민국로 침례교회’ 등 한인 기독교 교회에서도 개천절 행사가 있었다. 이후 임시정부가 일본군을 피해 충칭 등으로 떠돌아다닐 때도 민족의 통합과 번영을 기원하는 개천절 행사는 끊이지 않았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 귀국길에 충칭과 상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개천절을 기념하였는데, 여기에 기독교 교인인 도산 안창호, 사회주의자인 하빈 이동휘 선생 등이 참석하여 단군민족주의 이념은 종교나 이념을 초월한 민족적 단합 의지를 함께 되새기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하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처음으로 3,000여명이 참석한, 당시로서는 대규모 개천절 행사가 열렸다. 민족의 구심체였던 임시정부가 여전히 국권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통함을 토로하면서 완전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을 다짐하는 장(場)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대종교와는 또 다른 민간 자치의 여러 단군전들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8년 4월 남북이 분단되자 개천절 행사는 지역별 기관별 행사를 치렀을 뿐 정부 차원의 어떤 행사도 없었다. 1949년에는 개천절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양력 10월 3일로 변경하였다. 당시 개천절 행사는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에서 개최되었지만 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의 대독 경축사만 있었다. 1950년은 중앙청 광장에서, 1960년대에는 시민회관과 국립극장에서 각기 국무총리 대독 행사로 그쳤다. 정부수립 이후 개천절 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것은 1984년, 1985년 고작 두 차례뿐이었다. 1988년 이후부터 개천절 행사는 국무총리 경축사로 자리매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직도 개천절 행사는 정부 차원의 행사보다도 국내외에서 민간차원의 행사가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민족 분단이 가져온 행사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단군은 일제강점기에 ‘국가의 시조’이기보다 ‘민족의 시조’로 정착하여 한민족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여기에 남북분단 이후에는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단군을 기념하는 개천절은 한민족의 뿌리를 되새기고 민족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기념일이 된 것이다. 이같은 개천절은 남북이 이견 없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경축의 날인 동시에 통일을 향한 남북교류의 기폭제로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국경일이다. 실제로 북한은 1984년에 개축한 단군릉에서 해마다 개천절 행사를 행하고 있으며, 2004년 개천절 남북공동행사까지도 진행하었다. 그러나 평양행사에는 남쪽에서 간 인사들이 기념식과 학술회의에 참가했는데, 서울행사에는 북쪽 인사가 한 사람도 참가하지 않았다. 결국 남쪽 사람만 북쪽에 간 절름발이 공동행사를 한 셈이다. 그나마도 지금은 남북관계의 악화로 인해 단절되고 말았다.
한편, 지금은 개천절이 한민족의 개국시조 단군을 기리는 날로 널리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 개천절은, 신시개천(神市開天), 즉 하늘에서 인간 세상을 탐하던 하늘님 환웅(桓雄)이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제세이화(在世理化)를 기조로 신시를 개천한 날이다. 따라서 단군의 건국이념으로만 알려진 홍익과 이화는 하늘이 한민족에 직접 내려준 천부(天賦)의 명령(命令)이라고 할 수 있다. 홍익인간은 신시가 지향하는 한민족의 이상(理想)이고, 재세이화는 그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方法)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은 한민족의 이상이긴 하지만 특별한 시대적 이념이나 사상적 형이상학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사상과 이념을 포월(包越)하면서도 조화와 화합을 통해 세상의 평화와 인간의 삶에 가장 이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이 세상을 이치와 밝은 빛으로 다스린다는 재세이화는 모두가 홍익인간을 지향하면서도 그 실현 방식, 역시 세상과 인간이 당연히 수긍하는 하늘의 이치로, 또한 하늘이 뭇 생명을 살리는 도의 길[天道]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홍익과 이화라는 양 이념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가 바로 ‘홍익민족주의(弘益民族主義)’다.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된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는 과거 서구가 지향해 온 국가 팽창주의도 아니고, 현재 시장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각자도생의 패권적 민족주의도 아니며, 세계평화를 외면하고 한민족만이 살아남겠다는 폐쇄적 민족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각국 선린(善隣)의 세계평화를 전제한 열린 민족주의다. 요컨대, 한국의 민족주의는 만인과 뭇 생명을 살리는 ‘홍익민족주의’요,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역시 모든 생명에 하늘의 빛을 부여하는 이치를 존중하고 따르는 ‘이화민주주의(理化民主主義)’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이 같은 ‘홍익민족주의’를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폄하하면서 ‘종족민족주의’로만 비판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이화민주주의’를 제도 권력의 독선과 아집으로 허물어 가고 있다. 이들은 한민족이라는 운명적 문화공동체를 분단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에 무조건 가둬놓고자 한다. 그리고 분단국가의 표상인 이승만과 건국절을 포기하지 못하고, 이미 철 지난 과거 반북(反北) 냉전체제를 다시 소환하려고 하며, 분단 이전의 과거 민족의 역사를 소거시키려고만 하고 있다.
윤승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논문으로는 <한국종교의 이상세계론, 그 연구를 위한 시론>, <현대종교와 民族主義: 유신시대 (1972-1979)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종교지형변화>, <동아사아 종교의 근대화과 그 한계- 동아시아의 민중종교를 중심으로->, <민주화시대 불교개혁운동과 그 한계>, <한국 신종교에 대한 종교사적 연구와 과제>. <한국민족종교의 기본사상-단군, 개벽, 신명> 등이 있고, 편·저서로는 《한국 신종교와 개벽사상》, 《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책임편집),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책임편집), 《한국민족종교문화대사전》(책임편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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