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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종교
news letter No.855 2024/11/05
어찌 보면 그 차원과 성격이 다른 용어를 맞붙이는 것이, 독자들 심경에 불편을 끼칠까 봐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근년에 빈번하게 내 생각 속을 헤집고 다니는, 저 어휘들의 의미를 솔직히 짚어보고 싶다.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간주하며 한 걸음 물러나서 본다고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레바논- 이란 등지에서 반복되고 있는 전쟁과 테러야말로 인간이 초래할 수 있는 폭력의 최극단이다. 그 폭력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꼬리표 즉, 민족 · 종교를 거듭 주목한다. 특정 종교의 신앙심에 투철한 성년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순진하고 어린아이들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무구(無垢)한 아이들이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는데, 소위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다고 하는 온갖 종교계가 나서서 저들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히려 그런 학살 행위를 온통 성스러운 종교적 과업인 듯이 각색하고 그 안에서 선(善)과 진리를 가장하는 종교 권력자들이야말로 전쟁을 ‘성화’(聖化)하는, 이 참담하고 가혹한 사태의 핵심적 요인이라고 본다. 차마 나로서는 어떤 종교 자체가 살육과 전쟁을 부추길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신자인 일부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말하려 한다.1) 어찌 되었거나 오늘날과 같은 전쟁 성화(聖化)의 기원을 찾는다면, 멀리 천년쯤 소급해서 ‘십자군 전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 천년을 이어 온 종교권(圈)에서 ‘영적인 전투’(spiritual warfare)라는 말이 평상시 공공연하게 통용되는 것을 보더라도, 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행위의 씨앗은 틀림없이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예컨대 기독교인들은 왜 하필이면, 선교활동이나 혹은 개인적 신앙생활에 곤란이 생기는 것을 굳이 ‘전투’라는 개념으로 맞서도록 권장하는 것인가. 전투하는 자세로 임하라는 프레임(frame)에는, 반드시 적대적인 상대방이 상정되어야 하고, 승패(勝敗)가 결부되는 폭력적 행위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오다가다 보게 되는 기독교 선교용 안내문에서, 특히 부활절 즈음 교회들에 걸리는 현수막에서 ‘선교를 위해 총진군하자’는 표어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진군(進軍), 적과 싸우러 군대가 나간다는 뜻이다. 왜 기독교인들은, 사방팔방에서 다짜고짜, 자신들의 적(敵)을 상정하게 되는가. 말인즉,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들과 대결하며, 이교도들을 싸워서 이겨야 할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인데, 참으로 이해하기가 곤란한 사고방식이다.
비록 나는 불교인이지만 결코 기독교인의 적이 되고 싶지 않으므로, 몹시 억울하고도 불안한 소회가 생긴다. “타자와의 경계 지움을 통해서 질서를 재구축하고, 혹은 차이를 통해서 동일성을 구축하는 방식의 종교-문화적 메커니즘 자체에 분쟁의 잠재력이 있다”2)는 관점은, 특히 기독교의 맥락에서 더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 하는데, 소위 천부(天賦)의 그 거창한 가족사랑 가운데 특히 전쟁터의 가여운 사람들을 위한 사랑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그런가 하면 또 예컨대 불교는, 세상만사의 연기(緣起)하는 법 –인(因)과 연(緣)이 서로 어우러져 삼라만상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원리- 을 지혜롭게 통찰하라고 가르친다. 그 연기과정에서 나타나는 온갖 고통으로부터 자타(自他)를 구제하라는 것이 불교교의의 시작이자 핵심이다. 불교에서 수행생활의 비교적 우위(優位)로 권장해 온 출가(出家)는, 특히 가족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온 세상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내 몸처럼 여기려고 한다는 대내적 다짐이자 대외적 선언이다. 그러므로 실제 출가불자[승려]들과 재가불자들은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마침 최근에 열렸던 대한불교조계종단의 “2024 불교도 대법회” 등에서 발표된 메시지들을 들여다보니, ‘마음의 평안, 세계의 평화’3), ‘좋고 나쁨의 분별을 내려놓고 보는 것이 진짜 실상을 보는 것’4)이라고 한다. 대규모의 적대(敵對)와 살상(殺傷)이 한창인 가운데 세계 평화를 논의하는 학회에서 어느 불교계 인사는, ‘적(敵)은 허상’이라는 발언도 한다. 당장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아랍권에 확산되어온 전쟁과 그 피해자들의 고통을 우려하는 언급조차 나로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각자의 명상수련으로 여기서 나의 한 마음이 편안해지면, 자동으로 저기 모든 전쟁터의 그들에게도 평화가 온다는 건가?? 학살과 폭력의 실상을 진짜로 보려면, ‘좋고 나쁨의 분별을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건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지금처럼 험악한 폭력의 지구촌에 시의적절치 않은 말씀들이다. 허공에 뜬 구름과 같은 이 평화의 썰[說]들은, 내가 학습해온 인연상관(因緣相關)의 실천수행법에서 많이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구촌의 전쟁들이 모두 다 종교계 탓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이라면 먼저 나서서, 전쟁을 수행 중인 기독교인 · 유대교인 · 무슬림 혹은 다른 종교인 혹은 아무 종교도 갖지 않은, 수많은 병사들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모두 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는 대륙을 건너서 멀리 여기에 살고 있지만,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는 그곳의 사진만 보더라도 공포가 느껴진다. 그 극한 폭력의 현장 어디에, 과연 온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저들의 전쟁터에서 아군 · 적군 그리고 민간인들이 죽음 대신 삶을 간절히 기원하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순진무구한 아이들에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공포를 상상해보자.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우선 종교계의 역할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비(是非)를 걸어보았다. 그 다음으로는, 종교와 매우 밀접하게 경험되고 소통되고 묘사되는 영성(Spirituality)에 기대어서, 전쟁의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영성은, 특정종교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타고난 심성으로서 더 높은 권능[a higher power]과 관계를 맺거나, 온 세상이 커다란 하나로 연결됨을 알아차리는 역량이기도 하다.5) 그러므로 이 순간에도 전쟁터에서 삶을 간구(懇求)하는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염원이 느껴지고, 멀리 있어도 영적인 연계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영적인 돌봄이 우리 모두에게 성스러운 책무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구름 위를 걷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전한 전쟁터의 천진한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결코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그 기도가 온 지구촌에 울리도록, 그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서, 종교계와 비(非)종교인들이 연대하여, 지속적으로 전쟁의 종식을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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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병성, 「종교 폭력」, 『폭력개념 연구』, 모시는 사람들, 2024, 57쪽: 종교자체가 폭력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Hector Avalos의 주장(재인용)도 참고.
2) 강인철, 『전쟁과 종교』, 한신대 출판부, 2003, 75쪽.
3) 불교신문, 2024.10.02.일자 기사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19025
4) BTN 불교TV, 2024.10.10일자 https://www.btnnews.tv/news/articleView.html?idxno=82920
5) https://data.socwel.ku.edu/users/canda/Articles/sssw%20newsletter.pdf ; 강남대 신학대 편, 『종교와 영성』 도서출판 한들, 1998 참고.
이혜숙_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국제참여불교네트웤(INEB) 집행위원
논문으로 <종교사회복지의 권력화에 대한 고찰>, <한국 종교계의 정치적 이념성향 연구를 위한 제언>, <시민사회 공론장 확립을 위한 불교계 역할>, <구조적 폭력과 분노, 그 불교적 대응>등이 있고, 저서로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공저), 《임상사회복지이론》(공저),《종교사회복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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