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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문헌, 목록, 공구서
news letter No.854 2024/10/29
조선 천주교의 초기 신자들이 1811년 신미년에 로마 교황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처음에 서적을 읽고 천주교를 시작했습니다(初以書籍開敎).” 또 이런 말도 등장한다. “온 천하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간 곳 가운데 사제의 전교로 말미암지 않고 단지 글과 책에 의지하여 도를 구한 것은 우리 동국뿐입니다(普天下聖敎初入之地 不由司鐸傳敎 只憑文書訪道 惟有我東國).” 이처럼 조선 천주교는 책으로 시작된 종교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 천주교 서적을 들여오는 데에도 열성적이었고, 또 이를 번역하여 언해 필사본으로 돌려 읽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신자들을 이끄는 시대가 되어서도 천주교 서적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금지한 관계로 선교사들은 봄, 가을의 정해진 시기에만 비밀스럽게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교리서와 기도서를 구해서 암송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이에 호응하여 선교사들은 좀 더 많은 천주교 서적을 보급하기 위하여 인쇄소를 설치하여 대량으로 간행하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까지 다양한 천주교 문헌들이 필사본이나 목판본, 나아가서 활판본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천주교 문헌들을 분석하여 19세기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형성하고 있었던 신앙의 내용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 천주교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책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의가 매우 컸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 연구자들은 일찍부터 천주교 문헌 연구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한국교회사연구소를 비롯하여 천주교 역사 연구 기관들에서는 소장하고 있는 한국 천주교 문헌들을 영인본의 형태로 간행하였다. 이것은 연구자들에게 연구용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영인본 자료집 간행과 개별 천주교 문헌 연구의 기존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이제는 한국 천주교 문헌 전반을 종합적으로 점검하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우선 1860년대에 간행된 목판본 문헌과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간행된 활판본 문헌의 총량을 파악하여 전체 목록을 작성하는 작업과 국내의 대표적인 천주교 연구 기관들이 목판본 및 활판본 천주교 문헌들을 소장하고 있는 상황들을 파악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한국 천주교 문헌들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을 구축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2017년부터 사료 목록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교구별로 한국 천주교 사료들을 목록화하는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아직 사업이 완결되지 않아서 외부적으로 공개하고 있지는 않으나 상당한 정도로 한국 천주교 문헌들의 목록이 축적된 것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머지않아 목판본 및 활판본으로 간행된 한국 천주교 문헌의 총량과 현존 상황에 대한 조사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 천주교 문헌의 간행 역사와 연구 역사를 정리하는 일, 연구 방법론을 세우는 일, 향후의 연구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는 일 등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올해 초부터 몇몇 연구자들이 모여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간행된 한국 천주교 문헌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천주교 역사 전문가와 문헌학 전문가가 참여하고 있다. 연구 프로젝트의 세부 내용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대표적인 한국 천주교 연구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한국 천주교 문헌들에 대한 현황 조사를 진행한다. 천주교 문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서울대교구의 한국교회사연구소, 전주교구의 호남교회사연구소, 대전교구의 내포교회사연구소, 청주교구의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일차적인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해당 기관의 한국 천주교 문헌 소장 상황을 파악할 때는 해당 기관의 역사, 한국 천주교 문헌 소장 경위(수집, 이관, 매입, 기증 등), 정리 체계와 보관 방식 등을 조사한다. 그러면서 해당 기관의 허락을 얻어서 실물을 직접 보고 상세 목록을 작성한다. 문헌 목록은 서명/표제명, 저자/찬자, 간행 연도, 판종/판형, 형태 서지, 주기 사항, 소장처, 고유번호, 고찰 등으로 구성된다. 특히 역점을 두는 항목은 고찰이다. 해당 문헌의 판종이나 판형, 간행 연도 등을 규명하는 근거가 되는 사항들을 상세하게 적어서 연구자들에게 쓸모 있는 공구서가 되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둘째, 한국 천주교 문헌 연구 입문에 해당하는 원고를 집필한다. 문헌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 천주교 문헌 연구의 현황이 어떠하며, 어떤 연구 방법론을 개발해야 하며, 앞으로의 연구 과제는 무엇인지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먼저 목판본, 목활자본, 활판본의 순서로 한국 천주교 문헌 간행의 역사를 정리한다. 이어서 기존에 이루어진 연구들이 어떤 천주교 문헌들을 대상으로 하여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그 연구의 역사를 서술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헌학, 서지학, 판본학 등 문헌 연구의 다양한 방법들을 검토하면서 한국 천주교 문헌의 특성을 반영한 연구 방법론을 모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천주교 문헌 연구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안하기 위하여 향후 연구의 주제와 해결 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나는 지난 7월 하순에 전북 완주군 비봉면의 천호 성지 내에 있는 호남교회사연구소를 방문하여 일주일 동안 묵으면서 천주교 문헌 실측 조사를 하였다. 종교 문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가 이번 기회에 배운 바가 참 많았다. 실물 문헌을 직접 보고 만지면서 대조하니까 목판본과 활판본의 차이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광곽이 막혔는지 터졌는지, 글자가 흘림체인지 정자체인지, 글자와 글자가 이어져 있는지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였다. 또 줄자로 크기도 재고, 종이의 질이 한지인지 양지인지 살펴보았다. 같은 활판본이더라도 간행 연도에 따라서 판심의 권차 표기가 “뎨일”, “뎨一”, “권一”로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색인으로 만들면 판본 구별의 표식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번의 공동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한국 천주교 문헌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는 문헌 목록과 입문서가 나오리라 기대한다. 좋은 논문을 쓰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좋은 논문이 나올 수 있도록 그 바탕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앞으로 이런 일에 몰두할 생각이다.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 쓴 글로는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사료 연구>,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서설에 대한 분석적 접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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