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식물 사람: 철학적 식물학』 책 출간에 부쳐
news letter No.853 2024/10/22
“우리 모두가 살 수 있으려면, 평화롭게 살 수 있으려면,
나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에라짐 코학
얼마 전에 제가 번역한 책이 나왔습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학자, 종교인,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며 식물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옮긴이의 말>의 일부를 수정해서 올립니다.
1.
오늘날 많은 이들은 생태 위기의 근저에서 인간이 비인간 자연과 맺어온 관계의 위기를 발견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뒤틀린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생태철학과 환경윤리 분야에서 전개되어 왔다.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인간이 비인간 동물과 맺어온 관계가 뒤틀려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 동물철학, 동물권리 등의 논의가 활발해진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지구 위 인간이 거주하는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식물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현대인들은 식물을 망각한 문화 속에서 인간중심적, 혹은 동물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식물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간과되고, 인간의, 혹은 동물의 배경으로서만 인식될 뿐이다. 심지어 뒤틀린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생태철학 논의에서조차, 식물은 다만 어디에나 있는 ‘배경’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물 사람: 철학적 식물학』은 생태철학의 최전선에서 식물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한 본격적인 식물철학(혹은 저자의 표현대로 ‘철학적 식물학’) 저서로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식물세계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식물과 인간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모색하면서 자연과학, 종교학, 인류학, 철학의 연구 성과를 두루 아우르는 매혹적인 작품이다. 저자인 매튜 홀은 식물에 대한 동서고금의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접근 방식들을 비교, 분석한다. 저자는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초창기 식물학의 주요 선구자들, 그리스도교,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토착종교, 이교도 우주론 등의 철학적·종교적 유산에서 나타나는 식물과 인간의 관계 및 식물에 대한 태도를 주제로 다루면서 인간이 식물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돌이켜 볼 것을 요청한다.
2.
이 책은 먼저 고전 시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과 종교의 주요 논의들에서 나타나는, 식물을 주변화하는 “배제의 철학”의 흐름을 살핀다. 가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리니우스, 프랜시스 베이컨,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에게서 나타나는 식물의 주변화가 다루어진다. 특히 철학과 종교의 주요 논의들이 식물을 수동적인 비활성 존재로 여기면서, 우월하고 지배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식물을 자의로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해 온 방식들이 분석된다. 플리니우스에서 칼 폰 린네에 이르는 서구 식물학의 주요 선구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식물관을 분석한 대목도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는 서구 사상사에서 식물이 맨 밑바닥에 위치하는 존재의 위계질서가 정립되고 생명의 연속성이 무시되는 가운데 인간과 식물과 비인간 동물 사이의 뚜렷한 단절이 가정되는 방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식물을 인간의 윤리적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켜온 여러 종교문화의 접근 방식들을 검토한다. 먼저 ‘영혼(지바)’ 교리를 바탕으로 비폭력의 윤리를 전개해 온 힌두교, 자이나교의 주요 논의에서 식물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다루어지는 방식들. 감응적 존재로서 식물을 바라볼 때 일어나는 효과 등을 검토하고, 인도 불교, 티베트 불교, 중국과 일본 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식물이 어떤 자리를 차지해왔는지 살핀다. 그리고 최근 종교학과 인류학 분야에서 활발히 일어나는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 가운데 특히 북미, 호주, 뉴질랜드 원주민들이 식물을 비인간 사람으로 여기는 사례를 소개하며 종간 윤리(interspecies ethics)의 가능성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식물과의 대화적 관계에 참여하도록 독자를 초대한다.
3.
이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식물과 인간 사이에 생태학적으로 적절한 관계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적절히 결합해서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는 점이다.
홀은 특히 ‘식물 사람’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식물의 도덕적 지위를 재고하도록 요청한다. 사실 ‘식물-사람’이란 조어가 홀의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최근 들어 근대 서구문명이 생태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대한 반성과 대안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인류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나아가 예술가와 작가들이 ‘사람(person)’의 의미 확장을 시도하고 있으며, ‘돌고래-사람’, ‘자작나무-사람’ 등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와 같은 ‘사람’의 의미 확장은 그 단어를 인간에 국한해서 사용하는 현대사회의 일반적 통념과는 차이가 있기에 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러한 혼란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끔 의도된 것이다.
현대과학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식물과 인간의 관계에서 중요한 동서양의 문화적, 철학적 접근 방식들을 아우르는 이 책의 광범위한 분석은 오늘날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의 상호작용의 복합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이 책은 지구 생태계가 주관적이고 협력적인 존재들. 환경을 조직하고 경험하는 존재들 사이의 교섭임을 잘 보여준다.
4.
기후 변화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식물과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와 역동적인 결합을 다루는 식물철학은 오늘날 생태철학의 이른바 최전선에 자리한다. 홍수, 가뭄, 대형 산불, 코로나 19 대유행 등과 같은 재난의 근저에는 인간중심주의의 사유체계가 있다. 식물이 없다면 살 수 없는 인간이 점점 더 식물세계로부터 멀어지게 된 현실 속에서 식물의 도덕적 지위와 존재론, 식물과 인간의 관계 방식의 문화적·철학적 논의들을 다루는 이 책은 우리를 중요한 철학적 성찰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 * *.
시골로 이주한 뒤 해마다 봄이면 나무를 심었다. 저마다의 속도로 자라는 다양한 식물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늘 경이롭다.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을 알아차리게 될수록 이 세계가 인간만의 독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위로가 된다. 그리고 희망을 준다. 바라건대,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식물 세계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
『식물 사람: 철학적 식물학』 Plants as Persons: A Philosophical Botany 매튜 홀 (Matthew Hall), 유기쁨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유기쁨_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저서로 《애니미즘과 현대세계: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 《아픔 넘어: 고통의 인문학》 등이 있고, 논문으로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 〈‘병든 지구’와 성스러운 생태학의 귀환-생태와 영성의 현실적 결합에서 나타나는 종교문화현상의 비판적 고찰〉, 〈발 플럼우드의 철학적 애니미즘 연구: 장소에 기반한 유물론적 영성 개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55호-폭력과 종교 (4) | 2024.11.05 |
---|---|
854호-종교, 문헌, 목록, 공구서 (1) | 2024.10.29 |
852호-개천절, ‘신시개천’의 이념-弘益民族主義와 理化民主主義- (2) | 2024.10.15 |
851호-상징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코끼리 (10) | 2024.10.08 |
850호-우리의 이상한 말 습관 넷 (5) | 202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