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恨江은 흐른다
news letter No.856 2024/11/12
1986년 5월, 저는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생 몇 명과 함께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열사들에게 슬픔의 꽃을 바치며, 1980년 5월 희생된 한 초등학생의 무덤 앞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듬해에는 학생과 농민, 노동자들이 신군부 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섰습니다. 저는 한국이 곧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동방의 등불'이 되어 세계무대에서 떳떳하게 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타고르는 “그 등불이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조선은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타고르의 예언은 오늘날 전 세계의 젊은 층을 매료시키는 한류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듯합니다. 2024년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이 예언이 현실화되는 또 다른 한 조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역사적 내재력을 바탕으로 반세기 만에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타고르의 예언이 이 시대의 K-문화와 맞물려 불타오르는 것을 볼 때, 그는 1929년에 이미 이러한 가능성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타고르의 통찰은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한반도의 삼국이 미친 영향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본 체류 중에 <동아일보> 일본 특파원 설의식, 영국에서는 독립운동가 조소앙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역사와 민족의 저력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1913년 인도가 아시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배출한 이후, 2024년 한강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이 상을 수상한 것도 이 맥락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국가 폭력의 잔혹함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고통을 망자의 시선으로 전하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얽혀 있고, 역사적 트라우마가 대물림되는”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로, 아시아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일 것입니다. 타이완 작가 何與懷는 2024년 10월 19일 『上報』에 “韓江若是中國人 就是韓奸、賣國賊、反動文人了”(한강이 중국인이라면 그는 반역자, 반역자, 반동학자일 것입니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모옌(莫言)은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어둠과 악을 폭로하고 사회의 불의를 드러내야 한다고 하지만 그의 대표작은 중국 공산당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권력을 갖고 있던 1980년대, 천안문 사태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가 시진핑 정권에 저항하는 소설을 쓸 용기가 있을지, 또 썼다고 해도 이를 출간할 수 있는 출판사가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마찬가지로, 힌두 민족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인도에서도 정부의 폭력과 잔혹함을 고발하는 소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1920)의 첫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는 길과 가야만 하는 길을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은 ‘신에게 버림받은 시대의 신음과 가야 할 길을 잃은 세계의 불안’을 반영합니다. 한강은 민주화 투쟁이 활발하던 1990년대 초에 문학 활동을 시작했기에,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루카치는 별빛이 더 이상 길을 비춰주지 않는 시대에 분노하며 그 빛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을 “문제적 개인”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문제적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가 부패하고 무가치함을 깨닫고, 그 사회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진정한 가치와 이상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물입니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는 바로 그러한 “문제적 개인”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입니다.
작가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쓰러져간 사람들을 보며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군인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노래해 줄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것일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질문은 단순한 의문을 넘어 한국 현대사 안에서의 국가와 개인, 폭력과 정의,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한강은 광주 시민의 깊은 슬픔과 한국 현대사의 아픔인 ‘한(恨)’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한국만이 아닌 아시아 전체를 밝히는 예술적 영광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히 고통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고통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줍니다.
판카즈 모한_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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