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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비평》통권 21호(특집: 종교와 동물)를 내며
2012.4.3
<종교문화비평> 21호 권두언
바야흐로 정치와 선거의 계절이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선거는 안정적으로 4~5년 단위로 되풀이되면서 가장 뚜렷한 문화적 주기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정치라고 하는 단단한 괴물은 오로지 선거에 의해서만 주기적으로 파괴와 재생을 겪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는 희망과 절망의 정치적 상상력에 의해서 가동되는 세속적인 축제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트위터와 팟캐스트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들이 정치 현장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트위터의 거물들은 이미 1인 방송국의 기능을 수행하며 끝없이 언어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트위터는 기존 커뮤니케이션의 경계선을 지우면서 우리의 질병인 대화의 부재를 새로운 차원에서 보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들이 가상의 허공을 향해서 참새처럼 문자를 지저귀고, 그 울음소리에 놀라 수많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그리고 ‘나는 꼼수다’와 같은 팟캐스트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언론과 잡담, 정보와 비밀, 언어와 육체, 도덕과 음란 등의 경계선을 모조리 전복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뉴스와 가십의 엄정한 거리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삶의 모든 것이 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되는 ‘역사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종교학 연구자의 시선은 세계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찢겨지고 기워지는 성스러움의 지도를 향할 수밖에 없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금을 긋고 지우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의 몸과 정신의 내부 어딘가에서 종교의 혼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매우 불편한 학문적 태도인 것 같다. 왜냐하면 몸과 정신을 나누던 금 자체가 이제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릿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금을 긋고 지우는 행위 자체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종교는 잠시 우리의 몸을 차갑게 식히거나 이따금 뜨겁게 데워주고 지나가는 온도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그런 온기와 냉기에 의해 가능해진 현실만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종교도 있고 차가운 종교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온기와 냉기조차도 결국에는 금의 산물인 듯하다. 우리의 정신은 금 안에 들어가면 따뜻해지고 금 밖으로 나서면 서늘해진다.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은 이러한 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금, 신과 인간 사이의 금, 이 두 가지 금줄이 근대성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경계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의 특집 논문은 2011년 11월 19일에 만해NGO교육센터에서 개최한 ‘종교와 동물’ 심포지엄에서 발표되었던 글들을 다시 다듬어 싣고 있다. 우리는 2010년부터 이어진 구제역 파동을 겪으면서 소와 돼지를 더 이상 음식물로서 대할 수 없게 하는 묘한 냉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냉기는 인간 범주 안에서 따뜻하게 살아가던 우리들이 인간 범주의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발산된 것이다. 소와 돼지가 오염된 음식물로 취급되어 분리수거되었고 마치 전염병 바이러스의 거대한 육화처럼 여겨지면서 인간의 테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공격한 것은 어쩌면 그들 자신의 인간성이었다.
상한 음식이 된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씁쓸하게 ‘워낭소리’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그래서 여전히 휴머니즘에 대한 갈증을 지닌 채 우리는 종교 안에서의 동물의 존재 양태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소위 인간’이라고 하는 범주 자체를 재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우리의 종교 개념이 인간 개념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동물을 통한 인간 범주의 재성찰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위태한 종교 개념의 밑동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금이 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해야 했다.
기조발제 원고인 장석만의 〈종교와 동물, 그 연결점의 자리〉는 초월성, 초인간성, 초자연성 등으로 범주화되는 종교가 ‘신론’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동물론’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종교와 세속의 이분법과 연계하여 인간과 동물의 이분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에 선 채 양쪽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야누스적인 사유의 지점을 구축할 필요가 있으며, 인간의 얼굴과 세계의 표면에 새겨진 수많은 금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병욱의 〈인도종교에 나타난 동물 존중 태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힘사의 정신을 고찰함으로써, 동물뿐만 아니라 생명 일반을 살해하는 문제가 인도문화의 종교적 세계관 안에서 어떻게 사유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독자로서는 희생제의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류학적 해석이 전개될 필요가 있다는 자각을 얻게 될 것이다. 희생제의와 아힘사라는 중요한 종교사적 개념은 필연적으로 동물을 무대 위에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 살해는 항상 자기 죽음의 연습이기 때문이다.
김형민의 〈성서적 전통에서 본 동물의 윤리와 법〉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동물 논의를 성서적 맥락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그리스도교 전통과 신학에서 등장하는 인간과 동물의 다양한 관계 방식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구약과 신약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이 인간과동물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홍윤희의 〈중화민족이 용의 후예가 되기까지〉는 중국에서의 용의 상징의 역사성, 용이라는 동물에 대한 토테미즘적 해석의 등장, 그리고 이에 따른 ‘용의 후예’로서의 민족주의적 상징 전유에 이르기까지 용과 관련한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이 글은 동물상징의 정치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근래에 우리에게 동물이 문제되었던 방식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들을 일깨워주고 있다.
박상언의 〈간디와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는 채식주의의 문제를 통해서 역으로 그 이면에 감추어진 동물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해석해 내고 있다. 특히 이 글은 간디가 영국 채식주의와 만나는 역사적 접점에 주목함으로써 인도의 아힘사 정신이 근대적인 맥락에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육식에 대한 문화적 저항과 채식에 대한 종교적 해석의 묘한 울림을 만날 수 있다.
방원일의 〈원시종교 이론에 나타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토테미즘의 개념을 둘러싼 다양한 인류학적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아울러 토테미즘을 통해서 인간 범주에 대한 종교학적 반성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호에 실린 연구논문은 총 세 편이다. 민경식의 〈2011년도 종교법 판례의 동향〉은 19호에 실린 “2010년도 종교법 판례 동향”에 연이어 실리는 의미 있는 글이다. 법률과 법원이 근대종교의 구성에서 수행한 중요한 역할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다. 신혜진의 〈칸트의 이성신앙에 관한 연구: 꿈꾸는 자유, 그리고 종교의 존재이유에 관해서〉는 칸트가 말한 도덕적인 명령으로서의 신의 목소리의 관점에서 칸트의 종교관을 논의하고 있다. 개념과 범주가 작동하는 경계선을 살피고자 했던 칸트는 필연적으로 신과 종교의 문제를 참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창익의 〈신 관념의 인지적 구조: 마음읽기의 한계선〉은 마음 읽기의 관점에서 애니미즘, 의인주의, 유일신론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이 글은 신 관념의 직관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지적인 구조를 논의하고, 이를 통해서 유일신론이 지닌 인지적인 부자연스러움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이번 호에 마지막으로 연재되는 박종천의 이미지 기행은 〈성물과 부적: 접촉과 염원의 종교문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만화, 광고, 회화 등을 다루었던 그의 이미지 기행은 이제 성지, 성유물, 부적 등의 문제를 다루면서 종착지에 다다르고 있다. 종교적 이미지는 성스러움을 구현하는 다양한 비언어적 물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비언어적 종교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쩔쩔매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 기행은 이러한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 위한 의미있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 실린 설림 원고인 임현수의 〈중국종교 연구 방법에 대한 단상〉은 종교학 연구자들이 현재 안고 있는 다양한 학문적 고민을 들어보기 위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기획되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로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연구주제들이나 방법에 대해서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종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좋지만, 종교학이라는 장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30년이 된 임현수라는 연구자가 현재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이 글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우리는 글 이상으로 사람 자체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글에서도 금에 대한 고민을 발견했다.
이번 호의 주제서평은 관례에 비추어 보자면 상당히 예외적인 학자를 그 대상으로 선택했다. 우리는 구형찬의 〈“우리는 대안을 모색한다”: 지젝 읽기와 종교학〉이 기존의 서평 형식을 가급적 탈피하면서 새로운 서평의 양식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책의 저자인 지젝과 필자인 구형찬이 ‘싱크(sync)’되면서 발성하는 새로운 ‘두터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글 사이사이에 배어있는 필자의 복화술적 음성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이글은 <종교문화비평>21호(3월31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입니다.
이창익_
종교문화비평 편집위원
주요 논문으로 〈신화로 그리는 마음의 지도〉(2011),〈종교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마음의 물질적 조건에 관한 시론〉(2011) 등이 있고, 공저로 《불확실한 세상》(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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