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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구원론-종교와 종교학의 변증법, 그 너머의 자리

2011.5.10


단절되어 막혀버린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다시 복원시켜 주는 장치가 바로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상상력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때 종교가 발견하는 것은 버려진 채 고립되어 있는 외로운 인간의 슬픔이다. 종교는 이 고독한 인간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흔히 ‘성스럽다’라고 묘사되는 이러한 ‘다른 곳’은 죽음 없는 생명의 행복한 공간이다. 종교의 구원론은 어쩌면 이렇게 단출하게 묘사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는 인간과 신의 이어짐을 통해 인간이 비-인간으로 파열하는 것을 지향한다. 끊임없이 인간이 아니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종교의 모습, 이것이 종교와 종교인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종교는 항상 당혹스러운 것이 된다. 왜냐하면 종교가 만들어낸 비-인간은 다시 인간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적인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학의 시작은 바로 이와 같은 고민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정진홍 교수의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을 읽으면서 만나게 될 내용도 종교의 이러한 역설적인 모습들이다. 이 책의 제목은 정반대의 사실, 즉 ‘부정직한 인식과 닫힌 상상력’으로 피폐해진 우리의 현실을 계속해서 가리키고 있다. 종교의 핵심에 ‘다른 곳에 대한 상상력’이 놓여 있다면, 종교학의 중심부에서는 ‘종교에 대한 벌거벗김의 인식론’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종교는 우리의 상상력을 일정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하는 상상력의 교육학으로서 작동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종교학은 학습된 인식의 길만을 왕복하게 하는 동일한 이야기의 무한반복 장치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서 정진홍 교수는 폐색과 권태를 느낀 것 같다. 종교가 일정한 공식에 의해서 학습되는 ‘닫힌 상상력’의 배타적인 전달 장치로 머무를 때, 종교학이 지루한 동어반복의 권위체로서 지적인 폐쇄회로에 갇히게 될 때, 종교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산실이 되고, 종교학은 메마른 언어만을 암송하는 기도와 주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 정황 속에서 정진홍 교수가 종교와 종교학의 폐쇄회로를 단락(短絡)시키기 위해 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책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저자는 코기토(cogito, 사유)와 크레도(credo, 믿음)가 거치는 자연적인 생장소멸의 단계를 바라볼 수 있는 제삼의 자리인 레고(lego, 읽기)의 자리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때 저자에게 종교와 종교학은 ‘다른 자리’에서 새롭게 읽어야 할 텍스트가 된다. 그러나 저자는 텍스트를 본래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 읽어내는 탈맥락화의 독서를 지향한다. 이곳이 바로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시적 학문’의 자리일 것이다. 저자에게 시(詩)는 “낱말을 바꾸어”, “새 낱말을 되씹어야” 하는 새로운 언어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고의 자리에서, 즉 시의 자리에서 저자가 그려보는 ‘새로운 텍스트’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먼저 이 책에서 등장하는 ‘물음의 생태학’과 ‘종교의 생태학’이라는 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에게 ‘물음의 생태학’은 실존의 구불구불한 여정 속에서 성숙에 도달한 후 다시 경화(硬化)되는 물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종교의 생태학’은 종교가 비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구체화하여 분리된 다른 공간 속에 칩거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종교와 종교학이 단절을 통해 획득한 ‘물음과 구원’을 동시에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 저자에게 학문적인 물음과 종교적인 구원은 모두 ‘성스러운 분리’의 결과물이다. 마치 종교가 희생제의를 통해 성(聖)과 속(俗)을 분리시키는 것처럼, 종교학도 학문적인 의례를 통해서 특정한 신념을 반복하여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학문과 종교 속에서 공히 우리가 경험하는 폭력의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느덧 종교 기계, 학문 기계의 제품이 된다.

종교가 세상의 사물을 쉼 없이 성화(聖化)하는 장치라면, 반대로 종교학은 종교 안에 흡수되었던 사물들을 하나씩 꺼내 다시 속화(俗化)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사람, 사물, 장소 등을 일상적인 ‘여기’로부터 제거하여 비일상적인 ‘저기’에 있는 분리된 영역으로 옮겨주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과 신을 분리하는 장치이며, 낡아버린 성과 속의 경계선을 계속해서 감시하는 파수꾼이다. 이에 반하여 종교학은 성스러움의 경계선 너머에서 미소짓는 비-인간과 비-사물과 비-장소를 지속적으로 본래의 세속적인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속화의 장치이다. 이러한 속화의 대표적인 기술이 바로 역사서술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의 전부는 아니다. 원래 종교는 자신의 성화된 사물을 꺼내서 자발적으로 속화시키는 시스템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종교는 한 사물을 속에서 성으로, 다시 성에서 속으로 왕복운동하게 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생명력을 재생할 수 있다. 성화된 사물 안에 내재한 속의 흔적과 속화된 사물 안에 감추어진 성의 자취를 망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종교의 본유적인 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종교적인 사물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연희적인 여유, 종교가 스스로를 조롱할 수 있는 희극적인 웃음, 이런 것들이 종교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종교가 성스러움을 웃음과 놀이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되었을 때, 종교로부터 그러한 ‘성스러운 여유’가 사라졌을 때, 역사적으로 종교학이 출현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종교학은 성과 속의 변증법을 더 이상 구현하지 못하게 된 종교를 속화시키는 짝패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진홍 교수의 이야기대로 종교학이 종교사의 일부라면, 우리는 근대종교를 서술하기 위해서 ‘종교와 종교학의 변증법’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학은 속화의 기술을 잃어버린 종교를 구원하기 위해서 등장한 학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말이 학문의 순수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학문의 순수성에 대한 의심을 절대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런데 종교의 폐쇄회로를 치유하기 위해 등장한 종교학이 또 다른 폐쇄회로 안에 갇혀 버렸다면, 그래서 결국 종교는 성화의 기술을 통해 단단하게 굳어버린 ‘환상의 언어’만을 발언하고, 종교학은 속화의 기술을 통해 획득한 차디찬 ‘현실의 언어’만을 발언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종교와 종교학 사이의 언어의 교환이 불가능해진 ‘구원의 끝’에 이르러 있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언어를 발언해야 할까?

정진홍 교수의 고민은 이러한 자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의 부제가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진홍 교수의 입장에서는 종교가 극단적인 성화를 통해서 이제는 ‘더 이상 성화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것처럼, 종교학 역시 극단적인 속화를 통해서 ‘더 이상 속화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성의 속화’이자 ‘속의 성화’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진홍 교수는 종교의 ‘인간 구원론’과 종교학의 ‘종교 구원론’ 양자에 대한 또 다른 구원론의 자리를 탐색하고 있다. ‘구원의 구원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자리는 결국 종교와 종교학의 성화된 언어 모두를 속화하는 새로운 언어의 자리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을 요약하고자 한다.『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의 제1부 “종교의 생존 원리”가 다원적인 종교체계 안에서의 종교의 자리에 대한 소묘라면, 제2부 “고백 공동체의 언어”는 현대의 종교에 대한 병리학적 진단이다. 제3부 “편의에 빙의된 의미”는 현대문화 안에서의 생명담론과 죽음담론의 문제점을 서술함으로써 종교의 문화적 비가시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제4부 “물음과 해답의 에콜로지”는 상상력, 몸짓, 예술, 시, 이야기라는 주제를 통해서 종교와 종교학을 서술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으며, 제5부 “종교학 담론의 공간”은 기억, 언어, 인식, 상징, 번역의 문제를 통해서 종교와 종교학의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제6부 “신의 고향은 어디인가?”는 종교학사와 종교학 방법론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하여 성화된 종교학의 속화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종교와 종교학의 언어 기계와 직면하면서 표출되었을 ‘저자의 몸짓’을 독자들이 책의 언어 밖에서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이 글은 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이화학술원 지성사 총서 5권, 청년사, 2010.12)에 대한 서평 이며, 대한민국 학술원 통신 213호(2011.4.1)에서 전재 된 글 입니다.

이창익_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근래에 저술된 공저서로는 『불확실한 세상』(사이언스북스, 2010)이 있고,최근 논문으로는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와 「자연주의적 종교연구와 종교학의 죽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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