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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쇠고 난 후 되돌아본 음양력 소사(小史)

2010.2.8


2011년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달포가 넘었는데, 엊그제는 신묘년(辛卯年) 새해를 또 맞이하였다. 한 나라에 두 가지 새해가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체제를 지닌 두 종류의 역(曆)이 동시에 운용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 한국에는 ‘양력’과 ‘음력’이 공존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양력과 음력이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6년의 일이다. 양력은 그 즈음 서양에서 들어온 태양력을 가리키고, 음력은 태양력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전통 역인 시헌력(時憲曆)을 지칭하는 말이다. 서양의 태양력이 조선의 일상 영역에 공식적으로 소개된 해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이다. 태양력은 매우 급작스런 방식으로 소개되는데, 처음부터 일약 국가 공식 역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사용하였던 시헌력은 폐기할 계획이었다. 만약 1895년에 단행된 태양력 일원의 개력 시책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오늘날처럼 새해를 두 번씩 경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895년의 개력 조치는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난 직후 취소된다. 정부는 태양력만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을 번복하고 시헌력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한다. 졸지에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시헌력이 태양력과 공존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 이면에 양력의 상대 개념인 음력의 지위를 부여 받은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시 양력과 음력을 함께 사용하는 현실을 두고 ‘음양력 병용’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음양력 병용’이라고 하면 양력 역서와 음력 역서가 따로 따로 간행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한 가지 역서에 두 개의 역이 함께 표기된 것이었다. 이 역은 형태로 볼 때 단순히 양력과 음력의 물리적 결합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실제 이 역이 운영된 방식을 살펴보면 조선정부가 새롭게 고안한 역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1896년 양력과 음력을 결합하여 만든 이 신종 역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국가 공식 역으로 채택된다. 명시력(明時曆)이라 불렀던 이 역서는 1898년부터 1908년까지 발행된다.

명시력은 양력과 음력을 병용하면서도 그 기능은 분리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정부의 의지를 반영한다. 명시력은 음력 날짜에 국가 대중소사(大中小祀), 죽은 왕과 왕비의 기신과 탄신, 국가 경축일 등을 병기함으로써 음력이 의례적인 기능에 한정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반면 양력은 국내외 공식 문서 작성 및 행정 법률 관련 사무, 외교 통상 업무, 경제 활동 등과 같이 일상 영역에서 사용되었다. 태양력이 도입되어 양력과 음력의 구분이 생기기 이전의 전통 역이었던 시헌력은 원래 의례적인 영역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유일무이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 역이 의례력의 기능으로 제한된 것은 그 비중이 ‘음력’의 위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양력은 전통 역이 담당하고 있었던 많은 기능을 대신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정립된 양력과 음력의 기능 분화는 그 후 역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를 형성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마치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한국인은 두 개의 역을 사용하면서 1세기가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1909년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태양력이 다시 공식 역이 되었을 때도 음력은 의례력의 기능을 잃지 않았다. 대한민국 건국 후 양력과 음력 중 어떤 역을 국가 공식 역으로 채택할 것인지에 대한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근대화 과정에서 음력보다 양력을 우선시하는 국가 정책과 서구적인 생활양식으로 인하여 음력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의례력의 기능을 담당하는 음력의 지위는 아직까지 건재한 편이다. 지금도 여전히 기제사와 같은 집안의 각종 대소사나 종교의례 등을 음력에 따라 진행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음력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해마다 두 번씩 새해를 맞이하는 관습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인에게 음력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temps82@hananet.net


주요논문으로 <대한제국시기 역법정책과 종교문화: '음력'의 탄생과 국가경축일의 제정>, <한국 근대 초기 음양 이중

력의 형성과 의미: 대한제국기 명시력을 중심으로>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 <<근대 한국 종교문화의 재구성>>(공저)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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