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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94호-외줄타기와 송장 자세(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5. 16:56

외줄타기와 송장 자세

2010.2.23



1974년 8월 7일 새벽,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세계무역센터(WTC)의 남쪽과 북쪽의 110층 쌍둥이 빌딩. 그 빌딩 사이에 지름 22밀리미터의 쇠줄이 놓인다. 이는 전날 밤에 어둠을 틈타 아직 완공되지 않은 건물에 몰래 잠입한 친구들이 밤새도록 외줄 곡예사 필리프 프티(Phillppe Petit: 1949-)를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다. 두 빌딩 사이에 고정된 쇠줄의 길이는 약 60미터. 지상으로부터 높이는 411미터 50센티, 우리나라 63빌딩의 1.7배 되는 높이.

1968년 필리프 프티는 아픈 이를 치료하러 치과에 갔다가 잡지에서 쌍둥이 빌딩이 곧 뉴욕 하늘에 솟아 “구름을 간질일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그 이후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쌍둥이 빌딩의 구름을 잡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삶을 집중한다. 이제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이날 밤, 그의 표현대로 드디어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그가 쇠줄 위에 놓인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양손에 가지고 있는 것은 길이 7.9미터, 무게 25킬로그램의 가느다란 쇠막대기뿐. 허공에서 출렁이는 쇠줄의 폭을 줄이기 위해 두 줄의 받침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바람이 강하면 도저히 그 완화 기능도 기대할 수가 없다. 아침 7시 15분 마침내 그는 준비를 마치고 남쪽 타워에서 발을 떼어 다른 쪽을 향한다.

“옥상 끄트머리로 간다. 빔에 발을 얹는다. 왼발을 강선에 올린다. 체중을 오른발에 싣고서 건물 옆면에 찰싹 달라붙는다. 나는 아직 물질세계에 속해 있다. 체중을 살짝만 왼쪽으로 옮겨도 오른쪽 다리가 자유로워져 오른발이 줄에 사뿐히 닿을 것이다. 한쪽은 산더미, 내가 아는 생. 다른 쪽은 구름의 우주, 미지의 것으로 가득하여 우리 눈에는 텅 빈 것으로 보이는 세계. 너무 큰 공간. 두 세계 사이에 나의 존재가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머뭇머뭇 나눠 실으려 하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 나의 주위 아무 생각도 없다. 공간이 너무 크다. 두 발과 줄 하나 그것뿐.”(<<나는 구름 위를 걷는다>>, 이레, 2008, 234쪽)

그렇게 까마득한 높이의 허공에서 필리프 프티는 45분 동안 두 빌딩 사이를 8번이나 왕복하면서 쇠줄에 머물러 있다. 걸을 뿐만 아니라, 쇠줄 위에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하는 인사도 하였으며, 드러눕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지상에서 그를 올려보는 사람들은 그가 추락하여 죽을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을 졸였으나, 그는 자신의 머리 위를 나는 갈매기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쇠줄과 하나가 된 채,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그렇게 까마득한 높이의 허공에서 필리프 프티는 45분 동안 두 빌딩 사이를 8번이나 왕복하면서 쇠줄에 머물러 있다. 걸을 뿐만 아니라, 쇠줄 위에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하는 인사도 하였으며, 드러눕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지상에서 그를 올려보는 사람들은 그가 추락하여 죽을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을 졸였으나, 그는 자신의 머리 위를 나는 갈매기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쇠줄과 하나가 된 채,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뉴욕 경찰이 헬리콥터로 끌어내리겠다고 위협하고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필리프 프티는 쇠줄에서 내려와 경찰에 체포된다.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했느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그가 한 대답. “오렌지가 세 개 있으면 전 돌리지요. 높은 빌딩이 두 개있으면 전 그 사이를 걷는답니다.”

세기적인 “예술적 범죄”라는 표현은 매스컴에서 필리프 프티가 행한 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런 표현은 그의 공연을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주요관심사였던 닉슨의 워터게이트 뉴스를 누르고 그가 매스컴의 관심을 독점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신의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본 “이 세상 것이 아닌 현상”의 중요성을 어떻게 고작 대통령의 스캔들에 비교할 수 있는가? 필리프 프티는 공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제의를 행한 셈이 아닌가?

하지만 필리프 프티의 이 “제의”(혹은 “희생제의”)를 저 세상적(other-worldly) 분위기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필리프 프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환상적인 기적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완벽한 일치가 자연의 흐름 속에서 구현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의 리듬은 쇠줄을 흔드는 바람의 리듬과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의 집중 상태는 몸과 몸 주위의 자연을 하나의 단위로 아울러서 혼연일체로 만드는 것이다. 이 때 삶과 대립하는 죽음은 존재할 수 없다. 이미 죽음의 공포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수만 가지 요가의 동작 가운데, 고수들만 할 수 있는 고난도의 동작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그 기묘한 자세를 따라 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요가 동작 가운데 가장 어려운 자세는 그런 고수용 자세가 아니라고 한다. 이른바 송장자세라고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요가동작이라는 것이다. 송장자세란 온 몸의 긴장을 다 풀고 시체처럼 있는 동작이다. 삶과 죽음을 대립항으로만 보는 이들은 송장자세를 하기 어렵다. 살아남으려면 가능한 한 죽음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몸은 경직되고 신경은 곤두서 있다. 이런 이에게 필리프 프티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도 집중과 이완의 상호관계망을 만들고, 삶과 죽음을 소통시킬 수 있을 때 그런 기적은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필리프 프티에 관한 다큐멘타리가 상영 중이다. 시간을 내서 그가 제사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하루 저녁을 지내는 훌륭한 방법이 틀림없다.


장석만_

꼭두문화연구소 skmjang@gmail.com

주요 논문으로 <민족과 인종의 경계선:최남선의 자타인식>,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 <한국신화 담론의 등장>등이 있고, 저서로 ≪종교 다시읽기≫(공저),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는다≫(공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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