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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4호-테드 피터스와 유신론적 진화론(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4. 17:10

테드 피터스와 유신론적 진화론

2009.5.19


2009년 3월 18일에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는 〈다윈에서 도킨스까지: 유신론적 진화를 위한 변호〉라는 제목으로 테드 피터스(Ted Peters) 교수의 특별발표회가 열렸다. 참석하지 못한 많은 분들이 발표회의 진행 상황을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당시의 쟁점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테드 피터스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말하듯 과연 다윈의 진화론이 무신론자의 보루일 수 있는지를 물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도킨스처럼 진화론과 과학주의에 근거하여 종교의 퇴출을 주장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를 가리켜 ‘복음주의적 무신론자’(evangelical atheist)라고 부른다. 그리고 근래의 ‘복음주의적 무신론’이야말로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려 하는 과학화된 무신론’이기에 역사상 가장 지독한 무신론이라고 비난한다. 이처럼 그는 무신론과 진화론의 등식을 해체한 연후에 계속해서 진화론과 종교의 등식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피터스 교수는 종교와 과학의 싸움을 유신론과 무신론의 싸움으로 새롭게 포맷하고자 한다.

피터스 교수는 한편으로는 ‘과학주의’가 사실 얼마나 근본에서부터 종교적인가를 보여주려 하고, 역으로 다른 한편 ‘종교주의’가 어느 정도까지 과학을 포용할 수 있는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라는 문제의 본질적인 딜레마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피터스 교수가 ‘과학의 영성’을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의 물질성이나 종교적 물질주의를 철두철미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물질이 빠진 과학은 얼마나 공허한가. 또한 ‘복음주의적 무신론’이라는 그의 표현이 무신론의 종교성을 은유한 것이라면, 결국 마찬가지로 그의 ‘진화론적 유신론’도 과학의 은유에 그칠 공산이 큰 것처럼 보인다. 피터스 교수의 과학은 물질이 거세된 과학이고, 진화론은 어느덧 정신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물질 부스러기의 법칙’으로 격하되어 버린다. 결국 그에게 진화론은 신정론(神正論)의 한 축을 담당한다. 물질이라는 악의 문제는 자연의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이며, 그러한 악취는 신과는 무관한 자연적 현상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악취를 정화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변수의 과학’인 진화론이다. 물론 이때의 변수는 신학적 변수이다. 반면에 피터스 교수에게 신학은 ‘상수의 과학’이다.

피터스 교수의 논점은 대부분의 유신론적 진화론자의 경우처럼 종교와 과학의 접목 가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탈신학화의 기호처럼 보이던 진화론을 재신학화 하고자 한다. 그에게 종교는 일차적 원인에 대한 것이고 과학은 이차적 원인에 관한 것이다. 종교는 시작과 끝에 대한 해답이고, 과학은 시작과 끝 사이의 중간을 형성하는 변수의 놀이에 대한 해답이다. 그러나 중간은 항상 시작과 끝을 지시하는 중간이며 결국 변수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의 상수에 이끌려 간다. 이를 위해 피터스 교수는 ‘미래로부터의 창조’라는 종말론적 원칙을 제시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구원=창조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창조는 미래에 놓인 ‘끝의 구원’이 된다. 따라서 그는 끝이 열려 있는 진화론적 진보 개념을 거부한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창조의 완성, 혹은 새로운 창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의 닫힌 끝에서 웃음 짓는 신의 모습, 그러므로 피터스 교수에게는 자연선택 역시 ‘변수의 과학’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다. 자연선택이 배제된 진화론은 맹목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테드 피터스 교수가 추구하는 것이 새로운 신학모델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의 이야기는 종교의 이야기이다.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자 『종의 기원』이 세상 속에 등장한 지 150년째가 되는 올해 학계와 출판계 여기저기에서 진화론이 새삼스레 주목을 받고 있다. 어떤 이들은 진화를 여전히 새로운 언어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진화=과학이라는 등식 하에 가동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이런 이들은 진화의 세례를 통해 역진화의 상징처럼 보이는 종교마저도 진화시키고자 한다. 종교는 여일, 반복, 닫힘을 주장하는 동일성의 가장 강력한 축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진화의 눈길을 피해 숨는 종교를 보며 낄낄 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가 항상 종교 밖에 존재하려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종교는 항상 종교의 밖에서, 종교의 그림자를 통해 진화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어떤 이름도 거부하는 전적인 부정성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절대시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지속적인 타자 산출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단검을 맞고 힘없이 무너지는 종교는 이미 종교가 벗어버린 하얀 허물일 뿐이다. 진화론은 결코 종교의 마타도어가 아니다.

죽음이 개체의 종말이라면, 생식은 종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극복이다. 마찬가지로 생명, 혈연, 민족 등의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하는 종교도 대체로 종의 차원에서 죽음의 문제를 극복했다. 이에 반해 생식을 부정하는 종교는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통해 죽음 이전에 개체 안에서 죽음을 극복한다. 죽음에도 녹지 않는 불사의 영혼을 창조하는 종교적 기술이 그러하다. 그런데 기독교를 위시하여 근대세계에서 승리한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하게 개별자 중심적인 종교로서 생존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개인종교의 탄생’, 혹은 ‘종교의 개별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생식 부정적인 종교가 승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종교에 내재한 생식 부정성이 진화에 대한 혐오감의 일차적인 원인은 아닐까 하는 생각 역시 해보게 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처럼 우리가 지상의 유일한 새로움은 새로 태어난 아이뿐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며 거기에서 종교적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생물학이 전하는 죽음의 종적 극복을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자야말로 진정한 진화론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진화의 상징성, 즉 생물학적 구원론에 주목해야 한다. 종교들이 진화라는 소화하기 힘든 언어를 어떤 식의 해석학으로 요리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진화론이 ‘생식의 실험실’ 안에서 싹 텄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리고 진화론은 인간의 몸이 얼마나 철저하게 외부로 열려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나아가 진화심리학은 몸과 정신의 경계선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도 보여주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물질에 각인되는 기억이 보이지 않는 생식의 선을 타고 유전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진화론은 우리가 먹는 것, 만지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이 유전자라는 가상의 UFO를 타고 다른 신체로 여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진화는 거대한 기억의 여행이다. 진화 개념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인간학의 모습은 이러할 것이다.


이창익_

한신대학교 학술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 저서로 <<종교와 스포츠: 몸의 테크닉과 희생제의>가, 주요 논문으로 <인지종교학과 숨은그림찾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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