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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1호- 치병의 기적과 치병 의료 봉사(정진홍)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9. 00:14

치병의 기적과 치병 의료 봉사


지난 4월 17일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우봉홀에서는 감격스러운 예배가 열렸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1983년부터 시작한 심장병 어린이 무료시술 운동을 펼친 지 25년 만에 ,그 수혜자가 4천명(정확히 4180명)을 돌파한 것을 기리며 감사하는 예배였다. 목회자와 신도들의 헌금은 물론 폐지, 우유팩, 헌옷 등을 모아 그간 81억 3천만 여원에 달하는 수술비를 지원했고, 1987년부터는 해외 어린이 318명도 도왔으며, 2007년에는 평양에 조용기심장전문병원을 착공했다니 그 지속성이나 규모에서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당해 교회의 홍보자료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과 그 가족들이 행복했을까 생각해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교회와 이 일을 위해 봉사한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말이 그렇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들 선한 생각을 갖지 않을까마는 그래도 종교인들이 이렇게 ‘선행’에 앞장서 주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그러잖아도 기성 대형 종단들의 비리가 언론매체를 통해 거침없이 고발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소식은 고맙기조차 하다.

이 일을 거울삼아 모든 종교들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이웃봉사를 실천했으면 좋겠다. 또 그것이 종교의 마땅한 모습이지 않은가? 이런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일에 결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일을 두고 우리 함께 생각해볼 일이 있다. 이 일을 주관하고 실천한 교회는 다른 교회가 아니라 순복음교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교회가 ‘치병의 기적’을 강조하는 교회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 교회의 이른바 ‘급성장 대형화’의 바탕에는 치병을 포함한 ‘잘 삶’에 대한 약속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삼박자 축복(영과 물질과 육신)이 그것이다. 건강은 신의 축복이고, 그렇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상황의 회복은 신의 기적에 의하여 실현된다는 주장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병을 고치는 교회’로 알려졌다. 종교에서 일컫는 이른바 치유의 기적은 비단 기독교에 한한 것은 아니다. 건강을 축복으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흔히 우리는 종교란 ‘영의 문제’ 또는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인간의 몸이 겪는 고통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몸의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추구하는 해답도 몸의 현실로 회귀하지 않으면 허황한 관념적인 메아리밖에 되돌아오지 않는다. 문제는 몸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몸에 가 닿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신에의 희구라고 하건 신의 은총이라고 하건 내가 간여할 수 없는 초월과 신비를 우러르며 간접적인 기원을 통해 몸의 현실에 다가갈 수도 있고, 인간의 지혜와 헌신과 사랑으로 몸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이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의료행위를 통해 구체화한다. 그렇다면 의료행위는 몸에 대한 관심이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이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인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신의 기적을 이루는 수단이 바로 의료행위이다. 모든 종교들은, 그리고 순복음교회는 특별히, 이 둘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면서 신의 치유(신유)만을 두드러지게 강조해 왔었다. 이로 인한 신의 은총에 대한 감격은 때로 치유가 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다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채 삶을 지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져 그야말로 영혼이 병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 사례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의료행위를 배제한 채 치유를 기원하는 일은 분명하게 잘못된 일이다. 몸의 현실성을 그 현실성을 간과한 다른 통로를 통해 다가가려함으로써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몸의 아픔자체를 간과하는 데 이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심장병시술운동을 보면 순복음교회는 치유의 기적과 치병을 위한 의료봉사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이 계기에서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의료를 간과한 기원만의 몸에 대한 관심이 ‘설교’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인간의 지적 성취가 결코 이른바 신앙이라는 것을 위해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성숙한 종교적인 태도가 널리 확장되기를 바란다.


정진홍(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mute9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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