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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호-공공생활에서의 신앙(정진홍)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9. 00:34

공공생활에서의 신앙

우리는 살면서 ‘단일한 개인’으로 살지를 못합니다. ‘중첩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집안에서는 한 지어미의 지아비이고, 자식의 아비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이고, 사회에서는 시민입니다. 교회에서는 소박한 신도이고, 상점에서는 그저 고객일 뿐입니다. 저는 이러한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 속에서 과연 어느 것이 자기 정체성이냐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맥락 의존적’입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 정체성을 그 상황에 적합하게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에게 우선하고 더 중요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인 자기, 고객인 자기, 또는 종교인인 자기가 우선 선택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자기의 여러 정체성 중에서 하나하나 그 정체성들을 버릴 수밖에 없다면 어쩌면 마지막 남는 정체성,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 진정한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생깁니다. 바로 그러한 ‘마지막 정체성’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휘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무 데서나 애비 노릇을 하려 한다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물건을 팔려든다든지, 누구에게나 마냥 가르치려 든다든지, 아무 모임에서나 전도나 포교를 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짓’은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짜증스럽게 하고, 때로는 분노를 일으키게 하곤 합니다. 모듬살이에 혼돈을 낳는 거죠. 삶의 격률을 흩으러 놓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우리는 ‘늘’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실은 순수하고 정직하다는 사실입니다. 억지로 꾸미거나 속이려는 뜻을 숨기고 있거나 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가 그러한 태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면 자기의 순수와 정직을 들어 변명하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단순하고 투명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순수와 정직이 그들의 맥락-의존적인 정체성의 상실로 인한 ‘좋지 않은 사태’를 면책해주진 않습니다. 그로 인한 ‘재앙’은 감추어 있든 드러났든 이미 ‘현실’입니다. 공인의 경우, 그가 이러한 과오를 범하게 되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집니다. 공동체의 파열을 충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늘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충고가 그 해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고가 현실성을 갖지 못하는 두드러진 경우가 있습니다. 정치인의 종교적 발언이 그렇고, 신도와 성직자의 정치적 발언이 그러합니다. 비록 그 발언들이 자기의 정체성에 근거해서 보면 순수하고 정직하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자리에서 보면 유치하고 철없는 전형적인 ‘자라지 못한 아이’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국내외 정치인들과 성직자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언제 ‘돈독한 신앙의 종교인’들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의 신앙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지 조금은 답답해집니다.


정진홍(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mute9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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