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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는 정의로운 세상의 구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2013.1.29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 수년 째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있다. 그 책이 가지는 여러 가지 유용성, 예컨대 논술 교재로서의 쓸모 등의 덕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사회에서 정의라는 것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현실을 반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사회는 짧은 시간 안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양극화의 그늘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연일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자살 소식이 신문지면을 차지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게 인간끼리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요원한데, 요즘 종교에서 거론되고 있는 인간을 넘어 다른 생물에게까지 정의의 이야기를 확대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우선 인간에게 만이라도 차별-성별, 인종, 신분과 계급-없는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졌으면 한다.

 

지난 1월 24일 성공회대학교에서 <종교와 정의: 제4세대 통전적 정의론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있었다. 유교, 천주교, 불교, 개신교에서의 정의관에 대한 발표와 논평 그리고 종합 토론이 있었다. 대체로 사회정의에 대한 각 종교의 입장과 현실에 대하여 객관적이면서 다소 비판적인 논의가 있었다.

유교의 정의관을 발표한 김태완은 서구 개념의 번역어로서 ‘정의’라는 단어가 갖는 함의를 개관하고, 갑골문과 금문에서부터 유교의 고전 문헌에서 상응 개념들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서양에서 정의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폴리스를 구성하는 자유시민들의 문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동양에서 그에 상응하는 관념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김태완은 동아시아 왕조사회에서 “나를 바로잡는다”라는 관념의 문제에 대하여, “지식인이나 관료에게서 이 말은 사회의 부조리나 모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나’의 문제로, 주관적 영역으로 축소해버리고 일종의 자기만족적이고 자학적인 자기 검열을 요구하였다”라고 하면서 비판적 평가를 내렸다. 그렇더라도, 천리(天理)라는 개념은 유교사회에서 사회적 공공성을 확보하는 근거로 작용해왔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의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이루어져 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발표에 대하여 논평자 백민정은 서양의 정의관과 유교의 정의관을 가로지르는 중첩지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탐구의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천주교의 정의관을 발표한 이종범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연원하는 “suum cuique”(각자에게 그의 몫을)가 서양 정의론의 근간을 이룬다는 언급에서 출발하여 성경에 나온 정의를 거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정의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검토하였다. 이종범은 특히 한국사회에서 정의의 차원에서 천주교의 지나친 ‘토착화’ 내지 ‘보수화’를 문제 삼았다. 독일 등 유럽 가톨릭이 동성애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전향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데 반해서 한국 가톨릭은 여전히 보수적 입장에서 그다지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논평자 김혜경은 “맞고 사는 여자들이여. 남편들과 이혼하라!”는 제목의 칼럼이 가톨릭 신문에 한 사제에 의하여 게재되었다는 사실 등을 들면서, 한국 가톨릭교회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불교의 정의관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하였는데, 메이비스 펜이라는 학자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불교권에서 업설에 의하여 여성차별이나 계급차별 등 사회적 차별이 정당화되는 것이 경전적 근거상 비판받아야 할 관행임을 지적하고, 이러한 맥락에서, 원효의 유심(唯心) 관념이 주관적 유심론만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신라사회의 계급차별 등의 제도를 마음의 왜곡된 외화(外化)로서 객관적 정당성이 없는 현상으로 비판하는 기반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의 파격적 생애는 그러한 입장에서 사회 해방적 요소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논평자 조승미는 초기불교의 업설과 원효의 이론이 연계되는 지점에 있어서 사회정의의 문제가 얼마나 긴밀하게 관여될 수 있을지 뚜렷하지 않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사회자 김명희는 유식사상의 업설과 연관되는 아뢰야식설이 초기불교와 원효의 사상의 매개로서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함과 아울러, 불교의 윤회적 연기사상이 동물과 식물을 포함하는 여타 생명체에 대하여 보편적 자비를 실천하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개신교의 정의관을 발표한 박일준은 “가면과 환상으로서의 정의(Justice)”라는 도발적인 부제로 이날 종합 토론에서까지도 이 문제에 관련하여 집중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정의가 환상(illusion)으로서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은, “환상”이라는 말이 너무 네거티브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을 받았는데, 박일준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이 있어야만 자기만족의 오류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상”이라는 표현이 여전히 적절하다고 옹호하였다. 마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살아 있어야 개신교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는 폴 틸리히의 입장을 연상하게 하는 발표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하여 논평자 김희헌은 이러한 입장이 일면 타당하기는 하지만, 실천을 추동하는 데 있어서 무력할 수 있다고 하면서 구체적 불의의 현장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적인 힘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유교, 천주교, 불교, 개신교가 각기 정의실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종교들이 주류 종교로 존재하고 있는 한국사회가 왜 정의롭지 못한가? 천주교 발표자 이종범의 언급대로 종교들이 지나치게 한국적 토착화가 진행되어 각 종교의 근본정신이 왜곡되고 있다는 종교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고, 아니면, 폴리스를 구성하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합의로 구성되는 민주사회가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현실로 도래되지 않고 있어서라는 사회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류제동_
성공회대학교
tvam@naver.com
논문으로 <초기불교에서의 죽음 이해에 대한 한 고찰>, <불교에서의 폭력과 평화> 등이 있고, 저서로 <<하느님과 일심>>, <<화엄세계와 하느님나라>>(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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