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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님이신 장석만 선생님 이야기.


과거 기사로 갈음할까 합니다.


퍼슨웹문화기획집단(www.personweb.com)에서 '이색기획'으로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대학 밖의 학자들을 다뤘는데, 거기에 장석만 선생님께서 이름을 올리고 계십니다.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공간과 주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생적인 연구단체, 새로운 성격의 사회교육 단위, 인터넷에 기반한 네트워크, 지식정보를 다루는 기업의 연구조직 등이 기존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지식과 담론을 생산하고 수용하는 새로운 공간적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낡아버린 대학 시스템의 바깥에서, 그리고 이전과 다른 개념을 띤 대학에서 앎의 편재 방식과 내용을 바꿔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퍼슨웹이 만난 장석만·고미숙·윤해동·문순홍·이정우·이진경·이태원씨 등 7명은 이런 실천의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기존 시스템과 관계망에 적당히 타협하거나 적응하지 않는다. 대신 대안적이고 학문적인 실천을 직접 조직하거나 경험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철학아카데미’ ‘바람과 물 연구소’ 등을 이끌며 제도권 밖에서 삶의 ‘다른 길’을 모색중인 장석만·고미숙·이진경·이정우·문순홍씨의 행보는 각자의 공부 주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앎의 길과 삶의 길을 일치시키려 노력한다.


해당 기사는 '신동아'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2598/1


장석만 선생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따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근대성에 도전하는 종교문화학 연구자]

장석만(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 종교학과에 입학한 장석만은 ‘지양’이란 서울대 인문대 서클의 3대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반정부투쟁을 위해 공부를 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1977년 12월 ‘사회대 심포지엄’ 사건으로 강제징집된 그는 신병을 받는 부대가 해병대밖에 없었던 까닭에 해병대에 입대한다. 안 그래도 좀 ‘튀는’ 장석만의 이력에 ‘해병대 출신’이란 결정적 항목이 들어가게 된 내력이다. 


1980년 3학년으로 복학한 장석만은 학교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공부하는 것도 운동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장석만은 종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1992년 ‘개항기 한국사회의 ‘종교’ 개념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에서 1997년 사이, 장석만은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미국과 캐나다에 머문다. 그즈음 독일 튀빙겐대에 자리가 나 거기 눌러앉을 뻔했으나, 외국어로는 평생 자신의 사유를 자유롭게 풀어낼 수 없으리라는 걸 결정적인 순간에 깨닫고 귀국했다. 


근대성과의 씨름이라는 장석만의 긴 행로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시작됐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공부보다는 긴 호흡과 넓고 깊은 시야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라 여겼던 그에게 등대가 돼준 것은 미셸 푸코였다. 개념이나 담론의 지층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자명한 것의 자명하지 않음을 폭로하는 계보학적 방법론은, 수탈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다른 관점으로 한국의 근대를 바라보게 했다. 하지만 ‘종교’라는 개념을 ‘이미-거기’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그것의 형성과정 자체를 문제삼은 그의 논문이 당시 종교학과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그의 사유가 ‘이해받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장석만이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종교연구회 설립(1987)을 주도한 것도 대학원의 일반적 분위기가 이처럼 절망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때 이미 과정을 마친 학위소지자들이 취직을 하지 못하는 ‘적체’가 시작됐고, 대학원 내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서로 지적 자극을 주고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일단 조직이 결성되자 제도권의 탄압이 시작됐지만 오히려 그런 자극이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하는 계기가 됐다고 장석만은 말한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는 최근 사단법인, 즉 하나의 제도가 됨으로써 변신을 꾀했다. 이는 이 연구소가 더 이상 조직(단체)의 존폐 문제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 힘을 바탕으로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들이 진행돼야 할 것이다. 


공부가 윤리적 실천이자 삶 자체 


이쯤되면 학자로서의 장석만은 정말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에 관심이 없는 걸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활용하기 나름인 듯합니다. 이리저리 바쁜 삶에서 어떻게 자양분을 얻을 것인지가 관건이지요.”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는가 아닌가는 그의 삶에 변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모적이냐 생산적이냐는 ‘일’이 아닌 ‘사람’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리라. 


장석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돈은 못 벌면 안 쓰면 되는 것이라면서. 그렇다면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질문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그는 그것이 잘못 제기된 질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물음은 ‘인간은 모두 한 종류다’라는 식의 생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직업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근대인의 삶이 이런 거라면 장석만의 삶 앞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하지만 수식어 따위는 필요없다. 그는 ‘그저’ 공부를 삶의 행로와 연결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공부가 윤리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 학자로서의 신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지혜인 장석만에게 ‘공부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정확히 같은 질문이다. 


근대라는 시스템 하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을 허물어뜨리고 낯설게 만드는 것, 이제껏 자명하고 절대적인 지위를 누려온 것들을 사상누각 신세로 떨어뜨리는 것. 장석만의 문제의식은 일목요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불안에 빠뜨리게 되는 건 아닐까?  


장석만은 이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흔들리는 지반 위에서 겨우 무엇이 문제인지 어렴풋이 아는 상태로 서 있는 것.” 이런 장석만의 삶과 근대성이란 화두는 평행선을 긋는다. 평행선은 결코 헤어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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