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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67호-떠돌이 개, 드루리와의 공생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3. 26. 19:24

                           떠돌이 개, 드루리와의 공생

 

                     news  letter No.567 2019/3/26      

 




  
  
     
      몇 주 전에 밭에 가보니 어디선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밭두렁 좁은 배수관 안에서 개 한 마리가 웅크리고 사람을 경계하며 짖어대고 있었다. 조만간 어디론가 가겠지 하며 말았는데, 거센 비가 몰아친 다음날에 가보니 녀석은 배수관 근처에 있다가 나를 보자 짖어대며 황급히 배수관으로 기어들어갔다. 가까이 가보니 물이 가득 고여 있는 배수관 안에서 목만 내놓고 사람이 무서워 나오지 못한 채 떨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추운 날씨에 물에 몸을 담그고 웅크린 그 모습이 몹시 애처로웠다. 집에서 사료와 물을 가지고 그릇에 담아 근처에 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녀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 배수관에서 나온 녀석은 주춤주춤하면서 다가오더니 허겁지겁 먹이를 먹고 나서는 배수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매일 두 세 번씩 녀석의 근처에 먹이를 가져다주면서 조금씩 다가갔다. 마침내 녀석의 몸에 살짝 손을 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녀석은 내게 하염없이 자신의 신세를 하소연했다. 그처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개는 내 인생에서 처음 보았다. 으르렁거리는 것도, 짖는 것도 아닌. 물론 인간의 언어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 녀석이 하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다.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외롭고 막막하다는 신세타령을 녀석은 내게 긴 웅얼거림으로 오랫동안 전해주었다. 녀석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하루에 몇 차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조금씩 녀석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걸음걸이가 씩씩해져갔다. 다리 사이로 꼬리를 감추고 다녔던 녀석은 꼬리를 수직으로 세우고 걸어 다니는가 하면, 밭에서 신나게 뛰어다니기도 한다. 게다가 내가 밭일을 하는 동안 지켜보다 내 가까이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제 그 마음이 제법 편안해졌는가 싶다.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공생’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어느 종교에서는 상생을 주장하고, 공생보다는 상생의 용어에 좀 더 큰 의미를 두는 관점도 있지만, 사전의 정의대로라면 공생이라는 용어가 지금 내게는 더 실감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공생은 ⓵서로 도우며 함께 삶, ⓶(광물) 서로 다른 두 광물이 같이 이루어져 함께 산출되는 일, ⓷(생명) 종류가 다른 생물이 같은 곳에서 살며 서로에게 이익을 주며 함께 사는 일 등을 뜻한다. 이처럼 공생은 자기 종끼리만 아니라 서로 다른 종끼리도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적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생태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공생할 수 있을 것인지, 곧 공생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되면, 상황은 복잡해지고 답은 좀처럼 구하기가 어렵다.

     그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리처드 니버의 《책임적 자아》가 떠오른다. 그는 좋거나 올바름을 내세우는 윤리적 입장들과는 달리, 주어진 상황에 적합하게 응답하는 행위를 근본으로 삼는 ‘책임적 자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응답(response)과 책임(responsibility)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적 연결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그의 책임윤리는 상황과 응답에 대한 해석의 차이들이 일으키는 갈등과 긴장을 함축하고 있다. 오늘날에 우리는 동일한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서 ‘입장’, ‘해석’, ‘관점’ 등의 차이를 내세우면서 그 사건이나 상황이 지닌 위급함이나 긴요함 등을 간과하거나 외면하고 왜곡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입장의 차이를 내세우면서 다른 입장을 상대화하는 그와 같은 태도는 가히 ‘포스트모던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어느 누가 굶주림, 병듦, 아픔 등을 겪는 경우, 그가 어떤 경로로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 상황의 심각성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운운하며 생각의 다름을 내세우는 태도는, 그러한 사태에 자신이 개입되기를 피하려는, 곧 사태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책임 회피라고나 밖에는 말하기가 어렵다. 나아가 그런 태도는 사태가 불러일으킬 불안과 손실을 차단하려는 자기방어일 수도 있다. 가령, 누군가가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듣게 될 때, 우리는 그 누군가가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 경우에 말할 것도 없이 타자를 그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나의 행위가 생명-타자들에게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 그리고 그러한 존재들의 삶의 방식과 터전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쩌면 니버가 말한 ‘책임윤리’는 그러한 조심과 염려의 마음에 자리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응답과 책임의 윤리는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펼쳐진다. 공생은 나와는 다르고 낯선 존재를 나의 관계망에 맞이하는 일이니, 곧 그 존재의 부름에 응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살며 생명-타자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상처의 주고받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철저히 규명해야 하지만,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원망의 심리적인 소모는 절제되고 정제될 필요가 있다. 나로서는 원망의 과녁을 세우고 화살을 날리기 보다는 낯설고 다른 존재들과의 공생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위안과 의미를 주고받는 세상을 꿈꾸는 몽상이 한층 즐겁고 이롭다. 나와 공생하는 날이 조금씩 늘면서 예전에 떠돌이 개가 쏟아냈던 원망과 한탄의 웅얼거림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건 힘든 삶에 대한 원망보다는 지금 새롭게 만들어가는 공생 관계에서 작은 위안을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억지일까.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들판 가득
      이름 아름답지 않은 개망초꽃들이 지천이다

     망하는 건
     속으로 어떤 이름에 몰래 침 뱉을 때다
     골목 뒤편에 숨은 채 갚아주겠다고 벼를 때다
     전적으로 네 쪽이 고약했다, 누군가를 팔아넘길 때다
                                                      (김경미, 〈소란지심〉)


    사족을 덧붙이면, 우리 가족은 그 떠돌이 개에게 드루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인 드루리 레인에서 따온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잠들기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습관이 꽤 오랜 기간 가족의 매일 의례로 자리했는데, 요즘에 읽고 있는 책이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인 것이다. 떠돌이 개에게 ‘드루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를 억지로 갖다 댄다면, 노배우 드루리 레인은 스스로가 청각 장애인이고, 그의 대저택에서 -비록 고용관계에 있지만- ‘꼽추’, ‘노인’, ‘난쟁이’ 등과 같은 약자들과 함께 공생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정도이다. 떠돌이 개, 드루리에게 내가 베푼 친절은 빈약하지만, 그의 눈빛은 평온해졌다. 그 평온한 눈빛에 나도 잠시 마음의 평온함을 맛보니 모두가 기쁘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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