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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 전 전쟁터에서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서


news  letter No.568 2019/4/2       




“도보 여행 덕분에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단련되었는지 부모님들께서 아셔야 할텐데...! 우리는 평화 시절에도 여기 저기 돌아 다녔잖아. 그 때 맸던 여행배낭은 지금 어깨에 짊어진 전투배낭 같았고, 촘촘하게 바느질된 무거운 여행용 장화 신는 것에도 오래 전부터 길들여져 있었지. 우리 모두는 발이 아프도록 걷는 게 뭔지 알잖아. 우리들 대부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반더포겔이 되었어. 이제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어. 우리들의 빛나던 청소년 시절 기쁜 여행이 의미하는 바를...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가면 너희들에게 더 많이 이야기해줄게. 어린 무리들아! 우리가 돌아가면 다시 너희들의 통솔자(Führer)가 되어줄게.(1918년 군인 반더포겔 편지 모음에서 인용)”

고향의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다정하게 편지를 썼던 반더포겔 소속 형들은 더 이상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1924년 조사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약 12,000명의 반더포겔 중에서 대략 7,000명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반더포겔(Wandervogel)은 계절에 따라 서식지를 바꾸는 ‘철새(Zugvogel)’라는 뜻이다. 이제는 거의 역사적인 운동으로만 기억되는데, 한독사전을 찾아보니 ‘청년 도보여행 장려회’로 번역되어 있다. 1896년 베를린 근교 슈테글리츠(Steglitz)의 김나지움에서 시작했다. 주말마다 회색빛 도시의 담장에서 나와 푸른 자연과 시골을 도보했던 청소년 운동으로,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상당수의 김나지움 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당시 노동에서 자유롭고 ‘반항’할 여유가 주어졌던 학생이라는 특권적 신분의 특성상 부르주아 청소년들로부터 시작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주의 노동자 계열 청소년 운동과 종교 계열 청소년 운동 등 다양한 계열의 반더포겔 지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20세기 독일사에 많은 정치, 종교, 문화 계열의 운동(Bewegung)들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도 반더포겔은 독일 청소년 운동의 시초이자 가장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문화/정치 운동으로 볼 수 있다. 1913년 10월 11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친 제1회 자유독일 청소년 날(Freideutscher Jugendtag)에 참석하기 위해 몇 일에서 몇 주를 걸쳐 호헨 마이스너에 도착한 청소년들이 이천 명에서 삼천 명이었다.

반더포겔들은 철새처럼 집을 떠나서 이 곳 저 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저렴한 가격에 머물던 숙소는 유스호스텔로 발전했다. 즐겨 찾던 시골에서 독일 민요들을 발굴했고, 고대와 중세 시대의 낭만적인 풍습들을 따라했다. 부모와 교사들의 도움 없이 자체적 집단생활을 조직하면서 자율적 성인으로 성장하고자 했고, 태양과 바람을 쐬며 강인한 육체를 만들어 갔다. 20세기 초부터 나치즘 시기까지 독일 미술에서 많이 나타나는, 태양이나 ‘메시아적 존재’를 향해서 팔다리를 쭉 펴는 ‘깨어나는 청년기 나체’의 이미지는 당시 역동적인 청소년 운동의 에너지를 짐작케 한다. 반더포겔들이 남긴 기록에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라져가는 자연적 삶에 대한 갈구, 민요와 시골로 대변되는 소박한 독일 민족성과 고향에 대한 향수, 자유롭게 신체를 움직이면서 발견하는 몸의 문화, 또래끼리 여행하고 집단 생활하는 것에 대한 설레임 등 다각적인 모습들이 담겨 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청소년 운동은 이전의 자연 친화적, 문명 비판적 운동에서 정치적 자각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환점이 되었던 1차 세계대전에서 청년들의 경험과 전쟁전후의 변화상들을 보기 위해서 한동안 인터넷 아카이브나 헌책방 등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자료들 중심으로 읽어 보았다. 그 중에는 1914-1918년 사이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보낸 편지들이 많이 있었다. 전쟁 초기에 전장은 꽤 낭만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참호를 파서 숨어 지내는 일상을 ‘두더지 생활(Maulwurfsleben)’로, 점령 지역 자연을 목가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묘사했다. 언제 실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를 프랑스 산야를 무장도보로 행렬하고, 야전(野戰)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봄을 맞아 피어나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산천을 보며 반더포겔 시절의 낭만을 떠올렸다. 같은 부대 내에 반더포겔 멤버가 있으면 예전처럼 아지트인 ‘둥지(Nest)’를 만들고 그 곳에 모여 노래하고 민속기타(Zupfgeige)를 연주했다. 즐겨하던 의식 중에는 6월 하지(Sommersonnenwende)에 풍요를 기원하며 밤에 불을 지피는 고대 게르만과 켈트 의식을 계승한 하지축제(Sonnenwendfeier)가 있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이교도적인’ 이 의식을 성(聖) 요한일(Johannestag)로 만들고 기독교적 상징으로 바꾸었다. 반더포겔들에 의해서 재발견된 독일 민속적 가치는 나중에 나치즘에 의해서 위대한 게르만적인 풍습으로 확대 왜곡 해석되며, 30-40년대 가장 널리 퍼진 일상적 축제였던 캠프파이어로 발전했다.

곧 끝나리라고 희망했던 1차 세계대전이 길어지면서 전투의 참혹한 실상을 겪게 되었는데, 이들은 전쟁이 자신들이 꿈꾸었던 또래집단의 동료애 및 낭만적 애국주의와 상당히 거리가 먼 것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미 1914년부터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 “너희들이 전쟁에 대해서 뭘 알기나 하는지... 여기에서 사람들은 그저 먹고, 자고, 생각하지 않는 동물처럼 죽은 동료들의 시체 위를 기어오르고, 피가 가득한 땅 위에 뻗어 있다.(1914년 10월 26일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H. v. P. 편지에서 인용)”과 같은 환멸적인 어구들이 눈에 띈다.

나치정권은 이러한 청소년 운동의 상징적 어구들과 조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하일 히틀러(Heil Hitler!)’로 알려진 인사가 반더포겔 사이에서 같은 집단에 속한 동료들끼리 친근감 있게 나누던 ‘하일(Heil!)’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친근한 인사에 담긴 또래들의 우정을 교묘히 이용하여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를 만들었다. 나치 정권은 젊은이들과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특이한 ‘게르만적 비전(祕傳)’의 상징들을 종교, 예술, 민속에서 다양하게 차용하여 교묘하게 정치화했다. 반더포겔 공동체인 ‘둥지(Nest)’를 통솔하는 선배(Führer)는 제3제국의 지도자(Führer) 히틀러를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반더포겔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논쟁적이다. 반더포겔의 본래적 취지에 동감하고 향수에 젖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더포겔 단체들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의 토양이 되었다는 비판도 많다.

전쟁에서 보낸 편지들 속에 나타나는 반더포겔들은 적군을 살해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전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도보여행’ 하듯이 배낭 매고 등산화 신고 왔다가 처참하게 죽어가고 친구들의 죽음에 충격과 환멸을 느끼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정치가들은 애국심을 자극하여 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냈고, 30년대에는 청소년 운동의 상징적 어구들과 의례적 행위들을 독재 정권의 슬로건(Parole)으로 사용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 시기의 정치, 종교, 그리고 예술을 들여다볼수록 나치 정부는 종합적 오컬트 집단으로 보인다. 무자비하고 ‘신비적인’ 이 집단의 희생물 중 한 무리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산천을 누비고자 했던 자국의 ‘철새들’이었다.

 

 


최정화_
서울대학교 강사
종교학 방법론과 종교학사 중심으로 공부해 왔으며, 현재는 근현대 유럽 정치문화 운동과 종교학, 그리고 비교(祕敎, esotericism)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는 《‘세계양심’으로서의 종교(Religion als “Weltgewissen”)》(RIT, 2013), 《루돌프 오토(Rudolf Otto)》 (De Gruyter, 2013, 공저), 논문은 〈루돌프 오토의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 〈인지학의 신지학적 기원과 치유 오이리트미(Eurythmie)를 통해 본 독일 근대 신종교의 치유담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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