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국가란 무엇인가
news letter No.617 2020/3/10
대학원 시절 친구 중 한 명은 대학을 나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자신의 동생에게 주민증을 발급받지 말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일련번호 부여에 따른 주민 관리 체계는 과거 군사독재정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전 세계에 유례없는 민간사찰의 도구이며 반드시 철폐되어야 할 국가주의의 소산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실제로 당시에는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주민등록 폐지운동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기도 했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주권을 가진 전 주민에게 일련번호를 매겨 관리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 증서에 민감한 개인의 생체정보인 열 손가락의 지문을 날인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90년대 재일동포 사회의 지문날인 폐지운동이 일본정부가 내국인과 달리 외국인에게만 지문날인을 강요하며 잠재적 범죄인 취급을 한다는 내외국인 차별주의, 또 여러 세대 동안 일본에 거주해온 조선인을 단지 귀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인 취급한다는 민족 차별주의 등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정부는 아예 내국인 전체를 범죄인 취급하는 것이니까요. 생활 곳곳에서 곤란함을 겪으면서도 오빠 말을 잘 들었던 그의 착한 동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언제쯤이면 주민등록체제가 폐지되는 거냐며 가끔씩 답답해하곤 했습니다. 정작 그것을 권유했던 제 친구는 주민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말이지요. 요새도 가끔 그 남매가 생각납니다. 이제 와, 다시, 전 세계에 유례없다는 한국의 치안 수준과 연계하여, 그것은(보다 정교하게 말하자면 범죄자 검거율이 되겠지만) 높은 비율의 주민등록체계와 그 안에 담긴 자국민의 지문 정보 덕분이라고 넌지시 생각할 때마다 말입니다. 설마 그 친구의 동생은 아직까지도 주민증 없이 살고 있지는 않겠지요.
CCTV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은 CCTV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지요. 누군가 집을 나와 여하한 수단을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모든 동선이 CCTV로 촬영된다니까요. 그 덕에 각종 범죄자의 소재가 비교적 손쉽게 확인될 수 있고, 요새 같은 시국에는 바이러스 확진자의 동선이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되어 국가방역에 큰 힘을 싣고 있기도 하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1984’라는 숫자의 상징을 알고 있는 이라면 그 편리한 전국의 렌즈구멍들이 아주 달갑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건 추론 가능한 사각지대를 포함하여 한 치의 빈 구멍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대한민국의 거리 구석구석에 설치된 CCTV는 공권력에 의한 것이니까요. 그 공권력을 행사하는 누군가가 작정하고 들여다보기로 한다면 민간인 사찰 정도야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디 거리의 CCTV뿐일까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자동차에는 블랙박스가 달려 있고, 여차하면 전 국민의 손에 들린 휴대폰의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릴 준비도 되어 있지요. 사설 영업장의 CCTV도 그렇고요. 이쯤 되면 전 국민의 전 국민을 위한 전 국민에 의한 집단 감시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사생활이란 게 있기나 하는 것인지요. 그래도 그 눈동자들이 일인 또는 일집단에게 전유되지만 않는다면 빅브라더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려나요. 시민사회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동의만 부여된다면, 오히려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으려나요. 글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진함이 남습니다. 어린 시절의 편린으로나마 과도한 국가권력의 집단 기억을 공유한 세대의 일원이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이라. 정말 그런가요?
역병이 창궐하는 시절입니다. 공동체의 단합된 의지와 행동력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이지요. 자신의 위생에 대한 느슨한 태도가 공동체 전체에 위해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 하에 모두가 조심하며 개인의 자유를 조금씩은 유보해야 할 것입니다. 답답하더라도 모임 자제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필요시 신상정보의 공개를 감내하며 내면의 두려움을 용감하게 극복하여 혼란의 여지없이 행정 당국의 지침을 따라야 할 줄로 압니다. 대한민국은 바이러스 유입의 초기부터 확진자 동선에 대한 철저한 추적 및 그것의 투명한 공개를 시행함으로써 감염의 사회적 확산 방지에 큰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거주자들은 공권력에 의한 확진자 동선 공지를 통하여 자신의 감염 가능성 정도를 가늠하며 불안감을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일부 공동체의 감염 방지 차원 필요 정보 비공개 의혹과 관련하여 몇몇 지방자치단체장들은 강력한 행정권한을 발효하기도 했습니다. 다들 어떠셨는지요? 솔직히 저는 해당 자치구의 주민인 것에 크게 안도하며 제 거주지역의 단체장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답니다. 이렇듯 정확하고 투명하며 과감하고 적극적인 대한민국의 방역정책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 향후의 성공 여부에 따라 세계 방역계의 새로운 모델로 기대되기도 한다는 전언입니다. 시시비비의 소지가 없지는 않겠으나마, 어려운 와중에도 참으로 힘이 되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득 옷깃을 여미고 다시 묻게 됩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우리는 몇 해 전 봄 말할 수 없이 비통한 참사를 겪으며 전 사회가 깊은 슬픔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아. 5년을 지나고 또 한 해가 더 되어 가는 일인데도 저는 또다시 눈물이 솟구쳐 글을 쓰던 손길을 잠시 멈춥니다. - Dears. Rest in peace, if you please! - 국가란 무엇인가. 이것이 당시 우리 사회의 크나큰 화두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국가란 무엇일까요. 현재와 같은 국민국가 형태가 전 세계의 주류 지역단위 시스템인 한, 국가는 국민 즉 그 국가의 국적을 소유하고 있는 주민입니다. 주권재민주의. 나라마다 헌법에 명시된 바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의 국가로서의 권한은 그 국가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왕국이나 일인 혹은 일당 독재국가의 경우에는 조금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2020년 현재 인류사회의 주류 정치권력 시스템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넘어가겠습니다. 주권재민, 이것은 인류사회에서 천부인권이 처음으로 큰 흐름으로서 천명되었던 18세기 이후 근대사회의 주된 정치이념이었으며, 이를 부인하는 이는 거의 없을 줄로 압니다. 불행히도 대한민국은 근대에 돌입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타인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았다고 참칭한 일부 세력에 의해 주권재민의 원리가 참람히 훼손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파로 아직까지도 근대의 시간을 살아가시는 전근대인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사세는 분명하니까요. 각설하고, 부언하거니와 국가는 국민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의미가 조금 좁은 범위로 사용될 때가 있지요. 바로 정부를 가리킬 때입니다. 범위를 더욱 좁혀 행정부만을 지칭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입법•행정•사법 기관을 통칭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국가권력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용법입니다. 일종의 환유인 셈이지요. 정부의 공권력은 바로 이 위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정부의 공권력의 한계는 국민의 위임의 정도에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공권력에는 당연히 공적 단위의 폭력 또는 폭력의 수단도 포함되는 것이고요. 위임받은 공권력은 반드시 위임받은 꼭 그만큼만 행해져야 할 것. 그것을 넘어서도, 그것에 못 미쳐서도 안 됩니다. 6여 년 전의 저 비극적인 사건은 당시의 공권력이 위임받은 정도를 한참 미치지 못하여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국가인 정부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발휘되어야 할 곳에서 발휘되지 못한 공권력의 힘은 엉뚱한 곳에 과도하게 투입되었던 것 같습니다. 공권력의 불균형한 사용에 대한 단죄가 촛불의 함성으로 울려 퍼진 것이었고요. 국가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정부의 역할과 그 범위에 대한 문제제기였을 것입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역병이 창궐하는 시절입니다. 공동체 전체의 안위를 항상 염두에 두고 모두가 조심하며 개인의 자유를 조금씩은 유보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과연 어디까지 유보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사회는 위기의 시점, 위기의 종류와 정도, 그리고 그 각각에 따라 조율되어야 할 개인의 자유와 공권력의 범위에 대해 논의했던 적이 있었나요. 내가 아무리 확진자로 판명되었다 할지라도, 활동노선을 포함한 나의 개인 신상정보가 내 동의 없이도 만천하에 공표되어야 마땅한 것인가요. 아무리 집단 감염의 우려가 있다 해도, 내 신념과 필요에 따르는 집회 소집 혹은 참여의 판단 결정을 권유나 회유가 아닌 오로지 강제력에 의해 금지당해도 좋은 것인가요. 아니, 그 전에 더 근원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나를 바라보는 CCTV의 존재가 부자연스럽게 여겨지지는 않으셨는지요. 주민등록 시의 지문날인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원래 그래야 하는 듯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셨던가요. 지문날인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면 효율성의 차원에서 전 주민의 DNA 정보 집적은 혹시 가능한 것일까요. 13자리 숫자로 구성된 번호로서 내 존재가 공인되는 그런 주민등록 체계가 없는 세상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혹 과거를 세탁하고 새로운 신분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고 부정되어야만 하는 일인 것일까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생각과 판단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만일 용인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 다음에는 또 새로운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용인한 그 제도들이 혹시 등장할지도 모를 빅브라더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 말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철인(哲人)에 의한 통치라 할지라도 민주주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란 그 누구도 완벽하거나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 주민이 위임한 권력이 일인 혹은 일집단에 오롯이 집중되는 오류를 방지할 수 있도록 제도의 보완을 위해 용심하고 용력해야 할 일입니다.
작금의 대한민국 방역정책은 전 세계로부터 새로운 모델로 기대되는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세계 방역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모릅니다. 개인의 자유와 공권력 혹은 국가권력의 사이에서 주민의 합의점이 새롭게 조율되는 신모델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향후의 어느 시점에서 그에 관한 길고 어려운 논쟁과 협의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시간이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공동체, 나아가 전 세계 인류 공동체가 합심하여 인류의 공적인 코비드-19 바이러스를 몰아내야 할 때입니다. 논쟁과 협의의 시간은 그 이후에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시간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주요 논문으로 〈조선 초 법화신앙과 천도의례〉, 〈조선 초 조계종의 불교주도적 자의식과 종파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전과 권근의 불교이해와 그 의의〉,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조선전기 승인호패제도의 성격과 의미〉, 〈조선 초 불교 사장(社長)의 성격에 관한 일고〉, 〈조선전기 도첩제도의 내용과 성격〉, 〈전환기 민간 불교경험의 양태와 유산〉, 〈참법(懺法)의 종교학적 기능과 의미〉, 〈조선전기 수륙재의 내용과 성격〉,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 〈전통시대 한국불교의 도첩제도와 비구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