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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이산 연력사의 <적산궁>과 <장보고 기념비>
news letter No.615 2020/2/25
아직 신종코로나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았던 올 1월초에 학생들을 인솔해서 히에이산(比叡山, 히에이잔) 연력사(延曆寺, 엔랴쿠지)를 찾았다. 나로서는 이번이 세 번째 답사이다. 교토의 후지산이라 말해지기도 하는 히에이산은 시가현(滋賀県) 오쓰시(大津市) 서부와 교토시 좌경구(左京區)의 경계에 위치하는 오히에이(大比叡, 848.3m)와 교토시 좌경구에 위치하는 시메이가타케(四明岳, 838m)의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남북에 걸친 봉우리들을 총칭하는 말로,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고야산(高野山)과 함께 예로부터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성지로 꼽혀온 곳이다. 산정에 올라서면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호(琵琶湖)와 교토 시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쪽 산정에는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인 연력사가 있으며, 그 아래 기슭에는 역사적・종교적으로 연력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히요시대사(日吉大社)가 위치하고 있다. 히요시대사에서는 지금도 히에이산의 지주신인 오야마쿠이(大山咋神)를 제사 지내고 있다. 한편 산정 북쪽의 오쿠히에이(奧比叡)는 예로부터 살생금단의 땅으로 여겨져 온 탓에 귀중한 야생 동식물이 풍부하고 특히 조류의 번식지로 유명하다.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라 불리는 《고사기》(古事記)에까지 그 이름이 나오며 문학 작품에도 많이 등장하고 오늘날 등산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히에이산은 일찍이 794년 헤이안(平安, 교토) 천도 이후 전교(傳敎)대사 사이초(最澄, 766-822)가 현재 히에이산 동탑(東塔) 지구에 788년 현 근본중당(根本中堂)의 전신인 일승지관원(一乘止観院)을 세워 일본 천태종을 개창한 이래, 왕성 헤이안의 북동쪽 귀문(鬼門) 즉 악귀가 드나든다고 여겨진 불길한 방위를 제어하는 왕성진호와 국가진호의 산이 되었다. 사이초 사후 자각(慈覺)대사 엔닌(圓仁, 794-864)과 지증(智証)대사 엔친(圓珍, 814-891)에 의해 천태종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이 중 엔닌은 횡천(橫川) 지구를, 엔친은 서탑(西塔) 지구를 개창하여 10세기 경 현재와 같이 동탑・서탑・횡천지구로 구성된 연력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역대로 연력사는 불교 종파에 관계없이 수많은 고승을 배출했으며, 이로써 히에이산은 일본 불교의 어머니산(母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연력사는 히에이산의 중심 상징이다. 실은 히에이산 전체가 연력사라는 사찰의 경내지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연력사는 단독 당우의 명칭이라기보다는 히에이산 산상에서부터 동쪽 기슭에 걸친 150여 개의 당탑 가람을 가리키는 총칭이다. 즉 연력사는 근본중당을 중심으로 하는 동탑지구, 석가당(釋迦堂)을 중심으로 하는 서탑지구, 횡천중당(橫川中堂)을 중심으로 하는 횡천지구 등의 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히에이산 3탑’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거 최성기에는 당탑이 3천 개소를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이초 사후 9세기 후반 엔닌과 엔친 시대에 이르러 비밀 전수를 원칙으로 하는 밀교의 가르침을 따라 후학 양성을 하면서 천태종은 두 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연력사를 본거지로 하는 엔닌 중심의 산문파(山門派)와 원성사(園城寺, 온조지)에 기반한 엔친 중심의 사문파(寺門派)가 그것이다. 이 중 귀문에 위치하여 악귀로부터 왕실과 수도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간주된 연력사 산문파가 호국불교의 도량으로 부각되면서 점차 정치적・경제적・종교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이 점은 히에이산이 사이초 입멸 후 사가(嵯峨)천황으로부터 연력사라는 칙액을 받아 진호국가의 도량이 되면서 황실과 귀족들에게 폭넓은 숭경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이리하여 천태종의 본산 연력사는 진언종(眞言宗)의 본산인 고야산 금강봉사(金剛峯寺, 곤고부지) 및 교토의 동사(東寺, 도지)와 더불어 헤이안 불교의 양대 중심축의 하나로 발전하는 가운데 당대 지성의 센터로서 중세 일본의 종교・사상・문화・학문을 주도했다. 이때 특히 종교사상사적으로 히에이산 연력사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에 입각한 신불습합 담론의 주된 생산자로 기능하면서 융합적이고 다원적인 불교문화와 학술 전통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연력사 최대의 성지는 동탑지구의 근본중당과 서탑지구의 정토원(淨土院, 조도인)이다. 근본중당의 전신이 일승지관원이고, 정토원에는 사이초의 묘소인 ‘전교대사 어묘’(傳敎大師御廟)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연력사 횡천지구의 중심인 횡천중당은 엔닌(圓仁)이 창건한 절로 성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그 앞쪽에 조그만 신사가 하나 있다.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그곳은 실은 연력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적산궁(赤山宮, 세키잔구) 또는 적산명신사(赤山明神社, 세키잔묘진샤)라 불리는 이 신사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자각대사 엔닌 화상이 칙허를 받아 당나라로 건너가 적산(赤山) 신라명신(新羅明神)을 유학중 불법연구의 수호신으로서 권청하여 자신의 주명신(呪命神)으로 삼고 그 공덕에 의해 10년간의 수행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으므로 귀국 후 이곳에 모셨다. 이후 전국 사원에서는 자각대사를 천태불법 전승의 대사로 추앙하면서 적산 신라명신을 천태불법의 수호신으로 삼아 모시고 있다. 적산명신은 재난을 없애주고 수명을 늘려주는 방제의 신이자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유명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저자로 일본 천태종 제3대 좌주(座主)이자 일본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대사 혜호를 받은 고승 엔닌이 입당구법 때 큰 도움을 받았던 장보고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의 적산명신을 일본에 권청하여 모신 곳은 교토 시내에 위치한 적산선원(赤山禪院)이지만, 그 후 엔닌의 가르침을 지키고 특히 횡천지구의 여법당(如法堂)을 수호하기 위해 횡천의 승려들이 새롭게 적산명신의 사당을 건립한 것이 이 적산궁이다. 그 유래가 《산문당사》(山門堂舍)라는 문헌에 전해지지만 창건 연도는 확실치 않다. 여기서 여법당의 유래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자각대사전》(慈覺大師傳)에 의하면 엔닌은 40세 때 병약해져 시력이 떨어지고 죽음을 예기하여 횡천지구에 초암을 짓고 3년간 입정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건강이 좋아져 《법화경》 8권 6만8천여 글자를 필사하고 그 필사본을 안치하기 위해 작은 탑을 세웠다. 이것이 여법당 또는 근본여법당의 기원인데, 지금은 근본여법탑(根本如法塔)이라 칭해진다. 횡천지구가 동탑 및 서탑지구와 함께 히에이산 3탑의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은 바로 엔닌이 건립한 이 여법당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이 적산궁의 제신 적산명신은 니치렌의 수행지인 횡천지구 정광원(定光院)에서도 30번신(三十番神) 중 25일째의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다. 삼십번신이란 한 달 30일 동안 날마다 교대로 국가와 해당 사원을 수호하는 30주의 대표적인 신도 가미(神)를 가리키는 말인데, 사이초가 히에이산에 모신 것이 최초의 사례로 중세 이래 널리 신앙되었다. 신라명신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적산명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그중에는 장보고를 신격화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연력사 경내에는 장보고와 엔닌과의 깊은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연력사의 요청에 따라 2001년 12월에 완도군에 의해 건립된 장보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엔닌이 창건한 문수루(文殊樓) 옆에 있다. 문수루는 광대한 연력사 경내 중에서 가장 많은 참배객이 방문하는 동탑지구 근본중당 정면의 다소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 곳에 위치한다. 기념비 주변에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쌓여 있어 학생들이 바라만 보고 있다. 그래서 “길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하며 내가 먼저 들어가 길을 다진 후 학생들을 불러 모아 기념비 명문을 함께 읽었다. ‘청해진대사 장보고 비’라 적힌 기념비 이면에는 한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장보고는 신라 사람으로 9세기 전반에 신라, 일본, 당 삼국의 해운질서를 바로잡고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아랍과 페르시아와도 활발한 해상 교역을 펼친 해상왕이다. 신라 서남해의 완도에서 태어나 높은 뜻을 품고 당으로 건너가 30세에 무녕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小將)에 올랐다. 타고난 용맹과 바다같이 넓은 도량을 지녔던 그는 동아시아 해상에 횡행하던 인신매매에 의분강개하여 828년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한 뒤 우의와 평화의 뱃길을 열었다. 일본 천태종의 제3대 좌주인 자각대사 엔닌은 9세기 중엽 9년 반 동안 당에서 구법순례하면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고 장대사가 세운 적산 법화원에 거했다. 그 인연으로 엔닌은 오대산과 장안 등지를 순례할 수 있었다. 엔닌은 그의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장보고에 대한 흠앙(欽仰)의 정을 다음과 같은 편지글로 남기고 있다. “아직까지 대사를 삼가 뵙지는 못했습니다만, 오랫동안 높으신 이름을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만 갑니다…저는 오래된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행히 미천한 자가 대사님의 본원의 땅(법화원)에 있습니다. 감사하고 즐겁다는 말 이외에 달리 비길 만한 말이 없습니다. 언제 뵈올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 더해갈 뿐입니다. 840년 2월 17일 일본국 구법승 전등법사(傳燈法師) 엔닌이 청해진대사 장군께 삼가 올림” 여기서 우리는 신라, 일본, 당의 문화교류 실상을 알 수 있다. 두 분이 다져 놓은 정다운 관계가 오늘날 두 나라 사이에 널리 알려져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라면서 이 비석을 세운다. 설립 2001년 12월 대한민국 완도군(청해진)
여기에는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나오는 장보고에게 보낸 엔닌의 서간문이 인용되어 있다. 그 서간문은 엔닌이 적산법화원을 떠나기 이틀 전인 840년 2월 17일에 쓴 것이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장보고에 대한 존경의 념이 가득 담긴 이 서간문은 엔닌이 중국에서 겪은 모진 고통의 깊이와 함께 그의 인간적인 품성을 느끼게 해 준다. 오래전 해상왕 장보고의 고향인 완도(옛 청해진)에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장보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이 글을 쓰며 인터넷을 찾아보니 2008년에 완공된 <장보고 기념관>에 관한 정보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다음에 꼭 다시 완도를 찾아가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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