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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철(饕餮) 읽기와 보기
news letter No.614 2020/2/18
도철(饕餮)은 예로부터 탐욕을 경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오늘날에도 ‘도철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듣기에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다. 도철은 어떻게 생겼을까. 도철은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돌이나 도기나 금속 같은 매체를 이용하여 도철의 이미지가 표현되었다. 도철 이미지가 가장 유행했던 시기가 상나라(기원전 약 1570~1045)와 서주(기원전 약 1045~771) 때였다. 이 당시에는 청동기 표면에 각종 이미지를 새겨넣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도철 문양이 가장 생동감 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두 눈은 누군가를 쏘아보는 듯하고, 아래턱이 없는 입은 크고 깊어서 무엇이든 다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좌우 대칭으로 배치된 뿔과 귀는 도철의 정체가 인간이라기보다는 어떤 초월적 존재를 형상화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도철의 인물 됨됨이는 욕심 많고, 사치스럽고, 남의 것을 잘 뺏고, 불쌍한 사람을 도울 줄도 모른다. 게다가 게걸스러운 식탐은 만족의 끝을 알 수 없었다. 자전을 찾아보면 도철이라는 한자어를 구성하는 성분 가운데 의미 부분을 담당하는 글자가 ‘식(食)’이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탐욕의 대명사인 도철의 캐릭터를 먹는 행위의 과도함과 연관시킨 것은 매우 즉자적이면서도 적절한 방법이었다.
기원전 3세기경 작품인 《여씨춘추》는 청동기 표면에 새겨진 도철의 모습을 머리만 있고 몸은 없다고 묘사한다. 현재 우리도 확인할 수 있는 도철의 이미지를 작가가 목격한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은 도철의 몸이 부재한 까닭을 설명한다. 아마 도철은 식인(食人)의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식탐이 지나쳤던 탓일까. 그만 삼키지를 못하고 목에 걸리는 바람에 자기 몸마저 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도덕적인 훈계의 의도가 분명하다. 한가지 도철에 식인의 이미지가 결부된 것이 흥미롭다.
이보다 더 시간이 흘러서 도철을 식인과 연관시킨 사람은 곽박(郭璞, 276~324)이었다. 곽박은 《산해경》 주석서를 썼다. 거기서 그는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 포효(狍鴞)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도철을 끌어들인다. 포효는 사람의 얼굴에 양의 몸을 하고 호랑이 발톱을 가진 존재이다. 곽박은 이런 포효가 욕심 많고 식인을 하는 도철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곽박의 견해는 별로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해경》에는 식인을 하는 존재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식인의 무리 중에서 왜 포효가 도철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어야 하는데 곽박은 막연히 그 둘을 같은 존재로 본 데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도철의 탐욕을 부각하기 위하여 식인의 모티브를 활용하려는 태도가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중국 고대 문헌에서 ‘식인’이 지닌 함의는 무엇일까.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식욕의 종말이 식인이란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의 한계를 극단적인 상황까지 끌고 간 다음, 결국에는 다시 찾아야 할 인간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곽박의 보충 설명은 포효라는 존재를 너무 도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곽박에 의하여 졸지에 도철이 되어버린 포효는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해석에 《산해경》의 저자는 동의할까. 적어도 《산해경》이 윤리적인 덕목을 강조하는 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식인을 달리 이해할 방법은 없을까. 가령 식인을 초월의 지표로써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을까.
앞서 이야기했던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의 이미지는 탐욕의 화신으로 묘사된 문헌 속 도철과 일치하는 것일까. 어쩌면 후대 문헌 속의 도철은 윤리적인 거름망을 통과하고 남은 잔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그것에 따라서 청동기 도철의 의미가 엇갈릴 것이다.
여기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 청동기 도철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도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말해서 상나라나 서주 당시에 그것을 무엇으로 불렀는지 알고 있지 않다. 다만 도철이라고 부르게 된 배경은 송나라 때 청동기를 연구했던 학자들이 《여씨춘추》에 나온 이야기에 근거해서 명명 작업을 진행했는데,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그 이름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공부하다 보면 늘 이런 반전의 상황과 마주한다. 반전은 연구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미지 해독이 문자 읽기의 방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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