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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26호-염병이 전하고자 하는 것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5. 12. 17:29

염병이 전하고자 하는 것

 news  letter No.626 2020/5/12   

 

 


2017년 1월, 특검에 소환된 최순실이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고 외치자, 옆에서 “염병하네”라는 대꾸가 세 번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 건물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아주머니가 최순실에게 매우 못마땅하다는 의사를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감염 혹은 전염하는 병을 가리키는 염병(染病)이 어떻게 욕설처럼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이 염병에 대한 과학적, 의학적 사실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염병에 대해 우리가 저절로 행하는 태도, 그리고 줄줄이 엮어내는 염병 이야기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현재 우리 사회도 염병하는 중이므로, 염병 이야기의 성격과 거기에 함축된 바를 묻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염병의 가장 큰 특징은 옮긴다는 것이고, 인간이 병을 옮기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염병을 일으키는 인자(因子)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색칠’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귀(冤鬼)의 소행이라거나 이웃의 해꼬지가 그렇고, 마마도 그런 색칠이다.(종교문화 다시읽기 625호, <무속 치병(治病)의례의 과거와 현재> 참고할 것) 하지만 1880년대에 구미(歐美)에서 병원균(病原菌)에 대한 연구 분야가 생겨나면서 미세균의 소행으로 특정되었고, 그 발생과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역학(疫學)이 나타났다. 세균학에 따르면 질병은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균이 인간을 매개로 이동하여, 표적이 된 인체의 경계선 즉, 구규(九竅)를 무단 통과하면서 발생한다.

염병의 치료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이동을 차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 안의 항체를 강화하여 이미 인체 내에 들어온 병균을 없애는 것이다. 염병의 이동은 물, 공기, 음식을 매개로 인간 상호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접촉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필요하다. 감염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몸과 몸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임이 금지되고, 누에고치 안과 같은 자기만의 공간에 격리되는 것을 권장하는 까닭이다. 그렇게 되면 거리에 사람들이 사라지고, 인간의 상호 관계가 차단되어 괴기스러운 적막감만 펼쳐지게 된다.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개인이 누에고치와 같은 자신만의 영역에서 나와, 사람들과 접촉해야 한다. 하지만 염병의 만연으로 개개인은 사회의 연결고리를 끊고, 고치 속으로 들어갈 것을 강요받는다.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말한 반(反)-구조(Anti-Structure)의 전도(顚倒)적 양상과 비슷해진다. 예기치 않은 이런 ‘거꾸로’의 상황은 그동안 당연하게 간주되었던 인간관계 및 상호작용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전염병의 위협으로 생물학적 전염이 부각되었고, 이와 동시에 인간관계의 사회적 전염에 대한 문제의식도 등장한 것이다. 도시의 발달과 전염병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구미에서 근대 사회학과 전염병학이 나란히 등장하여 발전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병원균이 환자의 출입구를 통과하여 침입하게 되면 환자는 이전과는 다른 위치에 처하게 된다. 인간 주체로서 이전의 독립적 지위를 상실하고, 병원균과 합체가 된 하이브리드의 숙주(宿主)가 되는 것이다. 이때, 주체는 병원균이고, 숙주는 자신도 모르게 병원균의 확장을 위해 봉사하도록 움직인다. 병원균이 ‘스마트’할수록 숙주가 증상 발현을 최대한 늦추고,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여, 슈퍼전파자가 되게 한다. 이 경우에 전염병의 피해자인 환자는 가해자로 탈바꿈한다.

두 번째 단계의 치료는 전염된 환자가 가해자로 바뀌어 병원균을 전파하지 않도록 우선 격리시킨 다음, 체내의 면역력을 높여 병원균과 싸워 이기게 하는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병원균일 경우에는 기존 면역체계를 교란하며 퍼지기 때문에 도무지 대항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아무리 치사율이 높더라도 환자가 스스로 이겨내고, 완쾌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기서 환자가 지닌 양가성이 나타난다. 완쾌된 환자의 혈장이나 혈청이 병원균을 퇴치하는 백신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전염된 환자는 치명적으로 위험함과 동시에 면역력의 소중한 저장고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은 환자의 치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생기는 것이므로, 염병 중인 하이브리드, 즉 주체성을 잃고 병원균에 조종당하여 가해자가 된 환자는 부정 일변도의 이미지로 덮이게 된다. 이때, 염병의 발생과 전파, 그리고 그 파괴적 결과에 대해 염병 환자가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잡도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흠이 될 만한 요소들을 덧붙여 나간다. 어쩐지 알고 보니 영락없이 음침한 ‘이단’이고, 불나방같이 밤 나들이하는 ‘동성애자’더라 라는 말이 빠르게 돌아다닌다.

염병 중인 사회에서는 전쟁의 수사(修辭)가 염병만큼이나 만연하게 된다. 우리와 그들의 경계선이 확연하게 그어지고, 마치 우주적인 선과 악의 싸움처럼 비장한 분위기가 감돈다. 천사와 악마의 종말론적 투쟁과 최종적 심판의 그림을 그리는 자도 생긴다. 그럴수록 병원균을 퍼뜨리는 염병 환자에 대한 적개심을 누르기 힘들다. 이런 배경에서 “염병하네”가 욕설로 작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병원균의 수족이 되어 좀비처럼 움직이는 염병 환자의 반대쪽에는 병원균을 박멸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의료진과 과학자들이 있다. 병원균 진영이 악마라면 그들은 천사 집단이다. 그들은 악의 진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영웅 혹은 영웅 그 이상이다. 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일컬어 ‘미션임파서블’의 톰 크루즈나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갖가지 염병 이야기에서 골자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하나의 전형적인 구조가 걸러질 수 있다.

“사악한 존재나 나쁜 기운은 언제나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가 잠깐 방심하는 틈을 타서 우리의 경계선을 넘어 침투한다. 그 사악한 존재는 우리 가운데 약한 자를 포섭하고 세뇌하여 그들의 수족과 첩자로 만들고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우리는 의료진과 과학자의 강철과 같은 의지력과 희생정신에 힘입어 사악한 병원균을 퇴치하고 다시금 우리 사회를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킨다.”

만일 이런 이야기의 틀이 돌아다니면서 뼈대에 살이 붙듯이 내용만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이라면, 염병 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의료진과 과학자들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물론 아직 염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염병 환자가 피해자라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이 염병에 걸린 것을 그들 잘못으로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염병의 발생과 확산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또 다른 염병을 초래하는 지름길일 따름이다. 지금과 같은 생활 방식과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한, 염병은 점점 더 큰 규모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금 빙하에 덮인 동토층이 녹아내리고, 밀림의 벌채가 계속되면 염병의 거처는 우리와 필연적으로 겹치게 된다. 염병은 잘못이 없다. 그저 살고자 할 뿐이다. 염병을 부른 것은 인간이므로 탓을 하려면 방향을 똑바로 잡아야 한다. 사투를 벌이는 톰 크루즈와 브루스 윌리스의 열연이 시간 때우기에는 흥미진진할지 몰라도, 그들처럼 살면 안 된다. 그들은 애당초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 영웅을 요청하는 사회는 자신이 한심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염병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치른 수많은 희생을 적어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 근대종교란 무엇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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