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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27호-정성 혹은 기도의 가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5. 19. 19:50

정성 혹은 기도의 가격


      news letter No.627 2020/5/19   

 


내가 보기에 모든 원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참된 원리는
다음과 같다. 선한 인간이 신들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기도와 봉헌과 경배로써 신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것이야말로
지복에 이르는 가장 아름답고 선하고 확실한 길이다.
《(플라톤의) 법률》





나모붓다야
이 인사말은 상대방에게 붓다의 가피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표현입니다. 저는 지난해부터 칭명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사람을 대할 때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기 직전이나 전화를 받을 때, 나아가 어떤 일에 마음을 낼 때에도 곧잘 사용합니다. 특히 마음 내는 일이 점점 쉽지 않은 나이와 시대에 이르러 존귀한 존재를 대하는 준비동작으로 꽤 유용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내는 일은 타자를 인정하는 일이고, 관계의 일굼이며, 그리하여 정성을 품앗이하는 일과 닮아있다고 봅니다. 특히 5월이 되면 더욱이 마음을 내는 일이 잦아지는 것 같습니다. 가정의 달이고, 스승의 날과 성년의 날도 여전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내되 ‘유대를 강화시키는 재화’에 대해서 생각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선물(Gift)」의 계절에 이른 것이지요. 인류학자 스트래선(M. Strather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기 한국인들은 각자에게서 잠재적 형태로만 존재하던 타인의 정체성 하나씩을 선택하여 그것을 ‘가시화합니다’(The Gender of the Gift, 1988). 즉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걸맞은 선물들을 하며 산다는 얘기입니다.

이 통과의례에 장인․장모의 5월 8일을 생략하는 일은 처가살이의 섶자리에 누워 쓸개까지 빨아야 할지도 모르는 엄중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결과 올해의 처가집 어버이날은 처남댁의 제안으로 ‘그 넘의 편리한(?) 외식(外食)’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식사 시작과 중간에는 돈과 ‘선물’들이 밥상머리를 타넘고 날라 다닙니다. 가난한 저의 빈손은 젓가락질만 하며 실로 이 역사적 운동 속에서, 하나의 '여파' 속에서 부끄럽고 불편할 뿐입니다. 그 순간 선물잔치에 화려하게 끼지 못하는 옹색한 연구자인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의례적으로) 선물을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모스(M. Mauss)의 『증여론』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자식들이‘되돌려 주는 부채의 몸짓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하면서 저는 문득 우리가 펼치는 5월의 답례의 동맹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습니다.

조르주 바타유(G. Bataille)는 “희생시킨다는 것은 포기하고 주는 것이다.”라고 의미심장하게 설파한 바 있습니다(『종교이론』2015[1973]). 그렇습니다. 어쩌면 저 선물에는 아마도 최초의 조상 혹은 신들이 빚은 희생(犧牲)이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을 타고 흐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누군가의 정성과 기도에 부응하여 주체로서의 사물의 지위를 높이는 ‘인격’으로 물화시키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아름답게 말하면 우리사회는 매년 5월이면 희생시킨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는 시간으로 충만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주는 선물교환의 윤리적 가치까지 더하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최근 들어 나라에서는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희생을 저에게도 주더군요. 이 5월의 선물(?)을 받아들고 저는 학문적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무엇보다 이 혼란은 그 흐름의 방향에서 가중된 듯합니다. 가령 이제까지의 수재의연금, 불우이웃돕기, 크리스마스 씰, 평화의댐 성금, 기성회비, 금모으기 운동 등 온갖 종류의 정성금을 내던 방향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돈은 답례인가? 답례라면 내가 무엇을 주었단 말인가? 되갚아야 하는 나의 부채인가? 그렇다면 왜 일방적으로 받아서 쓰라고 하는가?’등등 이런 저런 상념들로 머리가 아팠습니다.

조상님 전에 물어보았습니다. 부처님께도 물어보았습니다. 회신이 왔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추구하는 개인으로 사는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노동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포기하라는 나라의 가르침이었답니다. 포기하는 것은 희생현상 안에서는 내던짐의 철학입니다. 여기서 포기는 곧 투기(投企)가 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행위를 투기[企投, Entwurf]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투기는 잉여를 탐하는 투자(投資)가 아니며 투기(投機)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투기는 인간이 미래를 향해 자기를 던지는 일이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꿈꾸고 산화(酸化)하는 탈출이자 기획이라고 역설합니다.

저는 이 돈으로 실존하는 인간이 되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재난지원금>을 들고 붓다의 가르침을 여는 아카데미를 향해 투기하기로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 선택이 적절하지만 타자에게 유일하게 흥미로운 면도, 가장 흥미로운 면도 아닐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 행위에는 신은 인간이 신에게 주는 것과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준다고 하는 저의 학문적 신념의 결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더해 보았습니다. 호국불교?! 5월에 참으로 불교하는 일은 기부금의 이름으로 다시 토해내는 행위가 아니라, 근대화된 원시인들의 돈놀이를 내일의 에너지를 위해 슬기롭게 투기하는 일에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얼(妖孼)의 시대, 희생의 투기는 희사(喜捨)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정성 혹은 기도의 가격이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여기서부터 논의를 시작해도 좋을 듯합니다.

 



 


심일종_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논문으로는 <현대 한국의 조상의례문화연구: 실천의 현장에서 본 조상론>, <조선전기 국행수륙재 찬품연구>, <한국유교 종족의례의 특징과 의미: 時祭의 '순례화'와 '조상종교론'을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근래 연구는 의례음식과 한국인들이 종교하는 행위와 가치 등에 관심을 두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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