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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23호-‘지양’의 의미와 헤겔, 그리고 버틀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4. 21. 19:28

‘지양’의 의미와 헤겔, 그리고 버틀러

 

 news  letter No.623 2020/4/21

  




헤겔의 ‘지양’(止揚. Aufhebung)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책을 통해 자주 접한다. 더 나은 것, 높은 것을 위해 무엇인가를 피하고 하지 않는다는 일상적 표현으로서의 ‘지양하다’도 있다. ‘지양하다’란 표현과 그 의미가 내게 문득 새삼스럽게 다가온 된 계기는 어쩔 수 없이 외국어를 몸으로 익히고 발화해야 하는 낯선 환경 속에서였다.

독일에서 어학원에 다닐 때였다. 한 선생님께서 반 학생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신 적이 있다. 시원한 성격에 개인적 대화는 깊게 임하는 분이셨다. 내 경험의 한계 내에서는 이곳 사람들이 손님맞이 스트레스를 안고 화려한 식사를 준비하는 경우는 드물다. 손님들이 감사의 표시로 들고 가는 것도 소박하다. 나는 누구나 조합 가능한 크박(Quark, 치즈의 한 종류)과 산딸기를 섞은 디저트를 준비해 갔다. 다만 설탕을 이곳 습성에 따라 넉넉히 넣지 않아 디저트로는 낙제점이었다. 많이 남은 것을 보고 다시 들고 가야 할지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내 손에서 유리그릇을 친절하게 낚아채어 다른 그릇에 내용물을 옮기며 말씀하셨다. 보관했다가(aufheben) 자녀들과 함께 먹겠노라고. 이때 동사 ‘aufheben’이 내게 각인되었다. aufheben에 대한 또 다른 즐거운 기억은 손주를 보게 된 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였다. 자신이 아기였을 때 물려받아 누워있던 오래된 목재 침대를 창고에서 거실로 올려다 놓고 친구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잘 보관했다가(aufgehoben) 자녀를 위해 썼고, 이제 손주를 위해서도 쓸 수 있다니 참 좋다.”

지양하다(aufheben)의 기본적 뜻은 무엇인가를 위로(auf) 들어 올린다(heben)이다. 여기에서 중지하다, 폐지하다, 끝내다, 치우다, 취소하다, 간직하거나 보관/보존한다 등 다양한 추상적 의미가 파생된다. 특별할 게 전혀 없는 일상 표현 중 한 가지 뜻이 내게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 몇 대를 거쳐 온 아기 침대를 잘 보관하고 고쳐 쓰면서 새로운 세대를 위해 쓰게 됨을 기뻐하던 모습 - 이때 aufheben은 정적인 상태로 나중을 위해 ‘보존, 보관한다’는 뜻을 넘어선다고 느껴졌다. 지금을 부정하며 현재 문제와 동떨어진 과거 지향적 보존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잠시 어딘가에 떨어져 보관되겠지만 언젠가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에서 전혀 다른 존재를 위해 새롭게 쓰일 수 있다는 미래를 향한 설렘과 희망, 그리고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내포된 열린 뜻으로 들렸다.

몇 달 전 독일에 갔을 때 우연히 ‘지양하다’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문예란, 56-57면에 실린 주디스 버틀러의 글 “오늘날 왜 헤겔을 읽는가?”가 그 계기였다. 버틀러는 250년 전 태어나 활동한 헤겔이 왜 오늘날 의미가 있는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헤겔의 사상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헤겔 사상을 품는 방식은 일방적 충성이 아니다. 그는 《정신현상학》(Die Phänomenologie des Geistes)(1807년)에서 헤겔이 [당시 자신이 처했던] '지금'(now)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헤겔이 당대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철학과 정신의 역사성에 대해 사유했음을 주목한 것이다. 버틀러는 헤겔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진 않는다,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라 그럴 것이다. 대신 헤겔이 매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며 샴페인을 마셨다는 점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헤겔의 시대적 맥락을 다시 생각해본다. 1789년 7월 14일은 성난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날이다. 그는 매년 이날 축배를 들며 혁명을 기념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나폴레옹전쟁, 그리고 1830년의 7월혁명에 이르기까지 바람 잘날 없이 극심한 변혁의 시기가 그가 살아갔던 자리였다. 《정신현상학》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 –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으나 갈등과 폭력의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시대적 전환기에 탄생했다. 탈고 무렵, 나폴레옹의 예나(Jena) 점령으로 인해 그는 신변의 위협과 원고 분실에 대한 염려 가운데 도시 탈출을 감행해야 했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은 시대적 전환기에 대한 치열한 성찰 –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에서 시작한다.

버틀러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적 조건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말한다. 다양한 간문화적 조건하에서 사람들은 '상이한' 과거, 현재, 미래를 느낀다. 한쪽에서 진보, 발전이라 부르는 것이 다른 한쪽에서는 파괴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스스로 허물어지는 현실이며 난민 문제로 유럽문명의 허구성이 드러나고 있다. 환경보호운동이 종과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충분히 강력하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오만이었다. 민족주의와 소유개인주의를 넘어서 초국가적 공동체로 나아가리라는 전망 또한 회의적으로 보인다. 버틀러는 이러한 절망의 감정에 휩싸인 서구의 독자들을 향해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굴곡 속에서 서구적 근대주체를 사유의 기반으로 삼게 된 우리도 버틀러의 이야기에 공감할만하다. 그의 대부분의 저작이 꾸준히 한국어로 번역되고 많은 이에게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도 그가 시대가 당면한 문제에 깊이 천착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모든 희망이 종국에 다다르고 말았다는 감정, 숙명론(fatalism)은 시대적 전환기에 되풀이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도대체 어떠한 시대에 처해있는지 확신하는 느낌을 잃어버렸음을 뜻한다. 우리가 파괴된 세상을 남기게 되어 다음 세대의 우리를 향한 저주를 두려워한다면,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상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1) 세상을 파괴한 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시금 앞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가? (2) 우리가 역사적 시간 속에서 살아내는 이 삶을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 그는 우리의 역사적 현재에 보유된 잠재력을 긍정하기 위해, 우리 시대의 사회성과 비폭력을 잠재력으로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헤겔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이 글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버틀러의 타 저작에서도 빈번히 등장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이다.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갈구하고 그 인정을 통해 자기 이해를 갖게 되는 존재양식”을 가진다. 처음부터 늠름하게 홀로 자족적인 주체의 발생은 없다. 주체는 타인과의 차별화를 위한 지속적 투쟁과 타인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발전하여 비로소 등장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너와 나는 연결되어 있으며 너 없이는 나도 없고 나 없이는 너도 없다는 늘 있어온 낭만적인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지금 이 글은 버틀러의 글 내용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헤겔을 수용하는 버틀러의 태도에 대한 것이므로 여기에서 그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주인과 노예’의 장은 19세기 마르크스에 있어서도 당대 부르주아 사회의 의미와 계급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간소외를 해석해내는데 핵심적인 것이었다. 혁명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헤겔은 마르크스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헤겔사상의 한계는 혁명의 완성으로 나아가려하지 않았으며 기존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보수성이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더불어 기존 질서를 와해시키는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역사의 진보를 이룩하고 헤겔철학을 극복하려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헤겔이 현재화(actualizing)된 방식은 폐지와 극복의 지양이었다. 19세기 이들 사상의 의미와 그 시대적 기여는 잘 알려져 있다.

21세기, 버틀러의 지양은 섬세한 결로 진행된다. 버틀러는 헤겔의 관점을 통해 사회를 세분화하여 바라봄으로써, 파시즘적 사회통합의 표상이나 급진적인 개인주의로서의 고전적인 자유주의 이념들로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헤겔철학의 문제점은 통합된 국가의 형태로 민족을 이해하고 있으며, 국가권력의 강력한 정치적 형태에 의존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시대를 새롭게 설정하기 위해 그의 저작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존적 지양에서 버틀러가 헤겔과 작별하는 지양에 도달할 때는, 우리가 상호인정행위를 통해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고 번역의 가능성을 통해 다언어의 장벽을 넘어 민족국가의 언어를 통해 규정되지 않는 더 큰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가리라는 전망의 지점에서이다.

“헤겔은 이러한 점에서 확실히 내 의견과는 다를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헤겔과 작별한다. 그는 내 사상의 출발점으로 남지만 그는 또한 내 고유한 개념을 계속 사유해나가기 위해 뒤에 남겨두어야만 하는 사상가이다.” 버틀러는 《정신현상학》에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의미를 해석해냄으로써 헤겔철학을 현재화한다. 이후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철학으로부터 더 이상 통찰을 얻을 수 없는 한계점에서 그것을 잠시 지양한 후, 다른 길을 찾아 항해를 계속 해 나아간다. 그의 작별은 전적 거부로서의 결별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공존과 연대를 위하여, 그 지양된 형태를 잠시 보존하는 것이다. 이 보존은 다양한 방향으로 새롭게 분기할 미래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버틀러 글 바로 옆에는 그의 글에 대한 반박문이 실려 있다. 한 단 정도의 짤막한 분량이다. 문예란 편집진이 버틀러의 글에 대한 반론을 위해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에 더 흥미진진해지는 순간이다. 제목은 “논리(die Logik)를 잊지 말라!”이다. 예나 대학 독일 고전철학 교수로서 헤겔 전문가인 클라우스 비벡의 반론이다. 그는 버틀러가 헤겔을 현재화할 때 《정신현상학》에만 몰입해있으며 그 중에서도 단 몇 가지 부분만 조명하고 있어 편협하다고 지적한다. 이 시대를 위해 헤겔철학을 현재화하려 한다면 헤겔철학의 중추신경인 《논리의 학문》(Wissenschaft der Logik)을 포함시켜 논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의 학문》은 《정신현상학》의 결론을 그 시작점으로 삼고 있고 있으니 비벡의 비판 또한 새겨들을 만하다. 나는 버틀러의 지양의 태도를 보았을 때, 그가 비벡의 이러한 코멘트를 무시하며 넘어가기 보다는 그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숙고하며 자신의 사유를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켜 나아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겔사상을 독일 관념론의 틀로부터, 마르크스적 사유로부터, 또는 프랑스의 헤겔 수용사를 통해 정신분석학에 이르는 관점으로부터 등,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은 의미 있다. 헤겔도 자신이 처한 역사 속에서 삶을 살아내며 그 자신의 사상과 지양의 내용을 변화시켰다. 그가 어떻게 사유했으며 변화되어갔는지에 대한 재해석 또한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통한 재해석의 시도 가운데에서 핵심은 우리 시대에 당면한 한계와 모순을 극복해나가기 위한 통찰을 발견해내는 것일 터이다. 양자택일을 권(혹은 강요)하고 과정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자주 생략되는 우리 시대, 학제간의 협업을 강조하지만 현실에서는 학제간의 구분이 너무도 뚜렷한 학문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양이란 과연 무엇일까. 버틀러의 지양을 통해 생각해본다.

 



 


김태연_
숭실대학교
논문으로는 <dao als "Religion": Eine chinesische Debatte zwishen christlichen Missionaren und Konfuzianern aus dem Jahre 1891>
, <테크놀로지의 진화와 종교적 체험의 동역학: 근대시기 천도교와 개신교를 중심으로>, <슐라이어마허 『종교론』의 수용사적 의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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