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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두기- 왜곡된 표어
newsletter No.628 2020/5/26
언제부터인가 아침마다 나는 ‘금일 0시를 기해 코로나19 확진자가 O명이다’는 뉴스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금 맡고 있는 일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어린이집의 휴원이 원칙인 가운데, 우리 어린이집은 부모 맞벌이 등으로 인해서 긴급보육이 필요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다. 그러니 단 한 명의 교사라도, 단 한 명의 원아라도, 단 한 명 원아의 부모라도, 만약 코로나19 확진자가 되는 날이면.......그 파장이 무진(無盡)하다. 멀리 지방 교회에 다니던 열성(熱誠)교인이 서울사람을 감염시킬 거라고 꿈에라도 상상했을까, 클럽에 다녀온 강사가 감염되어 자신의 제자를 거쳐 택시기사를 거쳐 돌잔치 어린아이와 그 친지들까지 감염시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오래전 상영되었으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영화 <매트릭스>의 미궁(迷宮)과 같은 현실을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지금처럼 내가 불특정 다수의 안위(安危)를 매일같이 염려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만약 세상사 본연의 인과망(因果網)을 제대로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다면, 코로나19가 인과망의 구조에서 널리 전염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런 그물코의 어느 지점에 위치한들, 감염의 파장에서 누구 하나 온전히 제외될 수 없다는 점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우리는 이 생태체계의 복잡미묘한 인연법(因緣法)을 도외시하지 않고 존중했어야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상의상관(相依相關)하는 현상 자체가 세상만사다. 그런 이치에 역행하고 모순되는 인간의 생활방식을 성찰하고 돌이키는 반전(反轉)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상생과 공영의 기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조건 서로를 격리하고 멀리 지내다 보면 코로나19 사태가 자연히 해결될 것처럼 호도(糊塗)하는 말이, 소위 “사회적 거리두기”인 것 같다. 잘 알다시피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란, 코로나19 감염이 지역사회에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자는 캠페인이다. 매스컴에서 그 표어를 처음 접하던 때부터 솔직히 용어에 대한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생겼다.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라”는 말은 자칫 서로가 모든 이웃을 적대시하게 만들지 않을까, 혹시 불행한 일이 생겨도 그 이웃에 대한 연민(憐憫)이 없고 책임만 추궁하게 되지 않을까, 코로나19 확진자라고 하면 마치 범죄인처럼 사회적 유폐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소위 ‘사회적 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코로나19 이전의 사회생활 현장에서 혹시 어떤 사람들이 모여 북적이고 있었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만큼 그들 관계가 진정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일과 계층∙생활방식∙취향 등으로 인해서 사회적 거리가 다각도로 벌어져 왔고 무관심거리도 늘었다. 도시의 벌집 같은 고층 건물들을 상상해보라. 물리적으로는 충분히 가까이 있어도 그다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작금의 사회관계에서 더이상 사람 사이에 “거리두기”를 강조할 일이 아니다. 그 대신에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인 상호연계성(inter-relatedness)을 알아차리는 사회학습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요컨대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관심거리(방역 통제·투병·실직·빈곤∙봉사 등)를 각자 더 깊이 끌어안음과 동시에, 단지 물리적인 거리두기(physical distancing)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
마침 최근 WHO 제네바 본부에서 화상으로 중계된 코로나19 관련의 언론 브리핑 중에도, WHO 신종질병팀장 케르크호베(Maria Van Kerkhove) 박사가 사회적 거리두기보다는 물리적 거리두기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https://youtu.be/6BOKgSCPD4E). 상당 기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서 자칫 사람들이 고립감∙소외감을 느끼게 될까 염려하면서, 인간관계를 멀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필적 감염원(코로나19)에서 공간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옳은 지적이다. 만약, 방역을 위한 통제기간이 길어지고 서로가 이웃에 대한 경계심이 극심해져서 심리사회적 “격리”로 고착되어버린다면, 나는 그것도 사람에게 치명적인 병인(病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 정도에 상관없이, 평소 사회생활 관계와 소통에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가 건강한 관심거리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서, 어쩌면 그 심리적 소외감이 5월 연휴에 일부 사람들을 술집과 클럽으로 달려가게 했을 수도 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서로의 안녕에 기대어 사는 운명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프게 되는 원리를 무심히 잊어버린 모양새가 되어서 안타깝다. 하지만 언제든지 반연(絆緣)들과 교감하고 관심사를 나누는 일은 필수적인 생명현상이므로, 우리가 더 가까이 더 자세히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야 할 상황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코로나19의 난국을 우리가 제법 잘 헤쳐 나왔으므로,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절제하고 배려하고 협력한 우리의 모든 이웃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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