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나’는 ‘잃어버린 나’일까?
news letter No.624 2020/4/28
학문을 하는 것은 날마다 더해가는 일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일이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도덕경》 48장)
창밖의 나무나 꽃을 바라보거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엄마는 분명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인다. 그래서 내가 묻는다. “엄마 무슨 생각 해?” “아니..아무 생각도 안 해.” “꽃이 이쁘지! 이쁜 꽃 보니 젊은 시절 생각 나?” “응...그래..아빠 생각도 나고...”
치매 증상을 겪고 있는 엄마에게 나는 그녀의 의식에 어떤 것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자주 질문을 한다. 대체로 엄마는 과거의 어떤 시점의 사건에 대한 반복적인 회상, 그러한 회상과 동반되는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며 특정 시점의 자아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기억력이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뉴스의 기사는 기억하면서 자신이 지금 앓고 있는 질병에 대해서는 기억을 하지 못해 처방된 약 복용을 매일 거부한다.
치매를 앓는 엄마를 바라보는 고통과 그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의 미래에 대한 공포가 나를 압도한다. ‘뇌의 작은 부분이 손상되었을 뿐인데 정상적인 자기인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말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래도 오랜 시간 이른바 자아성찰을 위해, 그리고 깨달음까지는 몰라도 인격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도 하고 수행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면서 살았는데 그러한 노력의 결과들이 노화되어 뇌가 망가져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면...어떻게 해야 하나?.... ’
알츠하이머를 비롯해 이른바 치매 관련 질병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식을 빼앗아 가는 경험이라고 한다. 평생을 축적한 기억과 가치관, 가족과 친구, 사회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사라지게 하며 인간으로서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사실상의 경계를 부수어버린다고 한다. 치매에 의해 ‘자아의 지속적인 부식’이 결국 ‘자아의 완전한 상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는 자아라는 것이 서사적(narrative)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전체적인 삶의 이야기,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해 타인에게, 아니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가 자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측면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다. 심리학자인 도날드 포킹혼(Donald Polkinghorne)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었던 사건들을 하나로 통합해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자기만의 이야기들을 만드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기이해의 기초가 되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거리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즉 그는 자아란 궁극적으로 이야기들이 치밀하게 모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서사적 자아(narrative self)는 인간의 기억과 인지기능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겪고 있는 대표적인 증상 중에 질병실인증(anasognosia)이 있는데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타인이나 다른 사물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지만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만 업데이트를 못하는 것이 그 증상의 특징이다. 인간의 자아표상 시스템이 잘 가동되고 있으면 일상적 일화에 대한 기억을 의미기억으로 잘 전환시켜 자신이 누구인지 그 핵심을 잘 구성해 낼 수 있는데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경우 자아표상의 영역으로 새로운 정보들을 통합시키는 능력을 상실하여 다른 외부의 것들과는 달리 자신에 관해 아는 것과 관련된 특별한 형태의 의미기억을 소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듯 서사적 자아를 업데이트 하지 못해서 결국은 석화된 자아(petrified self)라고 부르는 상태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지의 역할이 자아를 구성하는 중심이라고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자아를 지워나가는 인식의 부식에 의해 아무것도 정말 남지 않을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피아 콘토스(Pia Kontos)는 오랜 기간 치매환자들을 관찰하면서 자아에 대해, 인지기능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른바 ‘체화된 자아(embodied selfhood)'라고 하는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체화된 자아란 몸에 배인 습관, 동작들이 인간성과 개성을 지지하고 전달하는 주체를 말한다. 데카르트 전통에서는 자아와 주체를 모두 마음의 영역으로 환원시켜 설명하지만 자아, 주체, 심지어 기억까지도 몸과 관계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자아가 온전히 인지능력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알츠하이며 병이 일관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능력을 파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알츠하이머 환자의 자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몸 안에 내장되어 있는 선인지적(precognitive)이고 전반성적(prereflective)인 자아의 형태로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우리가 인지만 가지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며 몸을 통해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체화된 자아의 사례들을 말한다. 예컨대 기억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단어 몇 개도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가 유대교 의례에서 기도문을 유창하게 암송한 사례를 제시하며 이는 부르디외(Bourdieu)가 말하는 아비투스(habitus)와 같은 것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자아에 대한 이론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통일성에 주목한다. 자아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입장의 대립은 결국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통일감을 불러일으키는 독립적 자아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기인한다. 현대 인지과학이나 뇌과학의 입장에서 독립된 자아의 실체성을 주장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경험되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알츠하이머를 앓아 자신의 이야기를 잊어버리거나 심지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도 주체로서의 나는 존재한다. 나 자신이 나의 기억과 인식능력, 감각기능, 신체활동 등으로 온전히 환원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서사적 자아와 체화된 자아, 그 이상의 ‘나’가 존재할 수 있다. 오온(五蘊)의 다발로 설명하든 양자의식(quantum consciousness)로 설명하든, 자아는 없다고도, 혹은 있다고도 단언할 수 없는 신비한 수수께끼이다. 종교학을 하면서 자아에 대해 수없이 읽고 생각했건만 노모의 치매 앞에서 무지만을 자각한다. 머리가 복잡하고 혼돈스럽다.
그런데 나의 고민과 혼돈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얼굴은 점차 편안해져 간다. 어느 날은 동자스님마냥 맑고 어느 날은 해탈스님처럼 여유롭고 깊다. 엄마의 기억과 뇌가 비어갈수록 엄마의 번뇌와 슬픔도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모든 질문에 “몰라~.”로 일관하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다. 그녀의 상태를 비참하고 가엾게 보는 나의 문제일 뿐 엄마는 편안하다. 어쩌면 엄마는 의도치 않게 노자가 말하는 무지(無知), 무욕(無慾)의 길<道>에 들어선 것인지 모를 일이다.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최수빈_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논문으로는 <중세도교의 자연개념 고찰-위진남북조 시대를 중심으로>, <도교의 생사관-전진교 문헌을 중심으로>, <도교의 금욕주의(Asceticism)>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