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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30호-여행으로 본 근대 신화의 탄생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6. 10. 00:48

여행으로 본 근대 신화의 탄생

 news letter No.630 2020/6/9  

 

주지하다시피 최근 세계 관광산업은 유례없는 불황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관광업계 전체가 멈춰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국가 중 관광산업 의존율이 높은 나라의 경우 ‘전염병 퇴치냐 경제 활성화냐’라는 갈림길에서 우려의 시선을 무릅쓰고 자구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일례로 그리스 정부는 코로나19로 인한 강도 높은 봉쇄로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분석하고 경기 회복을 위해 조만간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건강여권’(코로나 면역여권)을 준비해야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셈이다. 강요된 변화의 물살 속에서 필자는 한국 사회에서 관광 여행의 기원을 살펴보다가 기행문과 근대 신화 만들기의 연관성을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1920년~30년대에는 다양한 언론 매체가 발간되었는데, 발행 부수 확보를 위한 이벤트도 실시했다고 한다. 이중 《삼천리》는 창간호에서 문인 37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반도팔경’을 선정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당시 반도팔경에 선정된 곳은 금강산, 대동강, 부여, 경주, 명사십리, 해운대, 촉석루 그리고 백두산이다. 특히 백두산 경관에는 유구한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강조하였다. 일찍부터 한국인들은 백두산을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종산(祖宗山)으로 인식하고 신령스런 산으로 여겼지만,1) 민족의 기원 공간으로 백두산을 단군과 연결시킨 것은 한말에 이르러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피탈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신문 등 언론 매체에서 민족이라는 근대 개념과 함께 단군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또한 단군신앙 운동이 점차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고, 백두산에서 10년 수련 끝에 단군의 묵계(黙契)를 받은 백봉(白峰)의 영향도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신문에 연재되었던 백두산 기행문은 단군을 근대 신화로 자리잡게 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1921년 8월 6일부터 8월 20일까지 함경남도 도청에서 조직한 백두산 탐험대가 등정을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에 ‘아민족(我民族)의 발상지! 신화전설의 백두산에’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의 첫머리를 살펴보면, “조선민족의 시조 단군이 탄강하고 고조선에서는 제일 높은 산으로 산머리에는 사시를 두고 눈이 녹지 아니하는 백두산은 실로 조선민족의 옛역사의 발원지요 배달사람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산이라”고 하였다. 이 탐험대에 참여했던 민태원(1894-1935)은 《동아일보》에 〈백두산행〉이라는 제목으로 1921년 8월 21일부터 9월 8일까지 모두 열 여섯 차례 연재하였는데,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공간으로서 태초의 성스러움을 간직한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이곳은 단군 신화의 발상지며 이 산은 반도 산천의 조종(祖宗)이다. 우리나라 문화의 그 많은 것들이 이곳에서 비롯하였고, 이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숭앙의 표적지가 역시 이 산이다. 단군 이전에는 풀어헤친 머리와 맨발로 동굴이나 들판 아무 곳에서나 살아가던 원시의 사람들은 불을 뿜고 연기를 토해 내는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를 보고 신을 두려워하고 하늘을 떠받드는 종교적 의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머리를 묶고 비녀를 꽂으며 비로소 옷을 갖춰 입고 집을 지어 머무는 것을 배우던 백성들이 단체적 사회적 생활을 비롯한 것도 공동의 숭경체가 되는 이 백두가 있은 까닭이다.”

1926년 7월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승려 박한영과 함께 일본인 교직자로 구성된 탐험대원 58명, 신문기자와 화가, 촬영팀, 일본군 40명 등 200명의 대규모 여행단을 꾸려서 3주간의 일정으로 백두산을 여행하였다. 그에게 백두산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마치 순례의 길을 떠난 듯 성산(聖山)을 삼가 찾아 뵙고 인사드리는 근참(覲嵾)이었다.

최남선은 “사람이 공기를 모르고 고기가 물을 잊어버리는 셈으로 온통 그 속에 들어 있을수록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이 대개 상례이거니와 조선인의 백두산에 대한 의식도 실로 이러한 종류라 할 것이다. 언제 아무 데서고 이마를 스치는 것은 백두산의 바람이요, 목을 축이는 것은 백두산의 샘이요, 갈고 심고 거두고 다듬는 것은 백두산의 흙이요, 한집의 기둥뿌리와 한 동네의 수구막이를 붙박은 것은 백두산의 한 기슭이니...”라고 하였다.

그는 백두산을 등정하면서 쓴 기행문을 《동아일보》에 송고하여 1926년 7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23일까지 연재하였다. 당시 신문은 동시에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어 대중 의식을 효과적으로 창출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시기의 유력한 지식인들의 여행 체험을 담은 백두산 기행문은 단군 인식의 확산에 기여했고, 단군 이야기는 한국의 신화로 자리잡게 된다

모든 성스러운 것은 반드시 제자리를 갖는다 (All sacred things must have their place)
                                                                                         C. Levi-Stra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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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꾼들은 대체로 백두산의 신성한 땅을 밟으려 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산신령의 한거(閑居)를 방해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처벌이 내린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알프레드 에드워드 존 케번디시 Alfred Edward John Cavendish, 《백두산으로 가는 길 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 1891》

 

 

 

 

 

 


하정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1920~30년대 한국사회의 '신화'개념의 형성과 전개> , <근대 단군 담론에서 신화 개념의 형성과 파생문제>,〈신화와 신이,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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