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카에’와 인문학의 신
newsletter No.638 2020/8/4
이웃나라 일본의 코로나19 상황이 심상치 않아 2차 대유행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1차 유행을 잘 넘어간 것에 대해 일본의 매스컴들은 일본인의 위생관념이 철저하기 때문이라는 자평을 많이 내놓았는데, 다른 한편으로 특히 인문학계에서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대비하자는 진지한 자기성찰적 의견들이 꾸준히 개진되고 있다. 그 중 감염병의 일본사에 대한 관심에 주목할 만하다. 지진이나 역병 같은 재난의 극복을 위한 일본인들의 시도에는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다. 가령 1855년 10월 2일 밤 에도를 강타한 대지진 직후 2백여 종의 이른바 ‘나마즈에’(鯰絵)라는 우키요에(浮世絵) 목판화가 제작되어 엄청난 매상을 올렸다. 여기서 나마즈란 메기를 뜻하는 말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지하에 사는 거대한 메기가 난동을 부려 지진이 일어난다고 여겼고, 무가의 수호신인 이바라키현 가시마시 소재 가시마신궁(鹿島神宮)의 제신(鹿島大明神)이 그 메기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마즈에에는 흔히 메기를 퇴치하는 가시마대명신의 모습이 많이 묘사되어 나온다.
감염병이 돌 때도 일본인들은 우키요에를 통해 재난을 이겨내고자 했다.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역병으로 천연두, 콜레라, 홍역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천연두에 걸린 병자에 대한 위문품으로 병자 방에 붙이는 용도에 한정되어 사용된 우키요에를 ‘호소에’(疱瘡絵)라 한다. 포창신은 적색을 싫어한다는 속설에 따라 호소에는 붉은색으로 그려져 ‘아카에’(赤絵)라 불리기도 했다. 한편 1858년 콜레라 유행 때 제작된 우키요에는 ‘콜레라에’(コレラ絵)라 한다. 이처럼 감염병 유행시 제작된 우키요에를 오늘날 연구자들은 ‘시사 우키요에’(時事浮世絵)로 분류한다. 거기에는 그림과 함께 문자 정보가 많이 기재되어 나온다. 구입자들은 우키요에를 미술품으로서가 아니라 정보를 얻기 위한 인쇄 매체로 간주했고, 판매자측은 구입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한마디로 우키요에가 일종의 미디어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미술이 가지는 독특한 기능이었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그린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천연두(마마)와 함께 ‘손님’으로 묘사하면서 그 손님을 잘 위무하는 굿판을 통한 비극의 승화를 지향하고 있다. 손님이라는 우리말은 날수에 따라 동서남북 사방을 돌아다니며 해코지를 하는 귀신인 ‘손’에 존칭을 붙인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이사나 결혼 때 손이 없는 날이나 손이 들지 않는 방향을 택하곤 한다. 한국인에게 천연두(큰 마마)나 홍역(작은 마마)은 모두 손님으로 여겨졌다. 에도시대에 홍역이 대유행한 1862년 4월에서 7월까지의 기간 중에 많이 제작되어 출판된 우키요에를 ‘하시카에’(麻疹絵)라 한다. 여기서 ‘하시카’는 홍역(麻疹)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하시카에는 홍역의 예방, 유의할 사항, 홍역에 좋은 식물과 나쁜 음식, 일상생활의 섭생, 회복 후의 양생법 등과 같은 실용적 정보뿐만 아니라 홍역 증상을 완화시키거나 퇴치하는 주술적 정보도 함께 제공해 주었다.
< 그림1>은 우타가와 요시이쿠(歌川芳幾, 1833-1904)가 그린 하시카에 <홍역 양생초>(はしか養生草,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소장)이다. 거기에는 검은 콩, 보리, 오서각(烏犀角)을 홍역 수호신으로 의인화하여 홍역신을 퇴치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나온다. 이 중 검은 무소뿔을 약재화한 오서각은 당시 일본에서 천연두 특효약으로 널리 알려진 한방 해열제였다. 그것이 하시카에에 등장한 것은 천연두와 홍역은 증상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시카에에는 홍역 퇴치신으로 통상 무신(武神)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림2> 우타가와 요시모리(歌川芳盛, 1830-1885) 작 <유행병 홍역 퇴치도>(流行麻疹退散の図, 구스리박물관 소장)에는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학문의 신인 덴진(天神)에게 홍역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때 학문의 신은 헤이안시대에 정승을 지냈던 실제 역사적 인물인 스가와라노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를 가리킨다. 모함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죽은 그는 사후 원령신으로 제사지내졌고 중세 이후 학문의 신으로 전국 각지의 덴만궁(天満宮) 신사에 모셔져 왔다. 도래인의 후손으로 알려진 그는 당대 한문학과 한시의 최고봉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학문의 신에게 감염병의 퇴치를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자면 ‘인문학의 신’에게 코로나19의 퇴치를 기도하는 기묘한 발상이라 할 만하다.
글로벌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사태인 코로나19의 위기 앞에서 인문학자는 자연과학자나 의학자처럼 백신이나 치료약 개발 등과 같은 직접적인 공헌을 할 수는 없지만, 감염병 확대가 초래하는 인문사회적 문제에 대한 논리적인 진단이나 처방책을 내릴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위기의 때에는 어김없이 공포가 차별과 배제를 낳곤 했다. 하물며 “타자는 위험하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간에 전지구적인 규모로 공식화되고 있는 코로나19의 상황은 각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차별의식이 언제라도 노골적으로 부상할 위험성을 수반한다. 1995년 옴진리교 사건과 2011년 동일본대지진 및 현금의 코로나19 사태에 이르기까지 점차 심화되는 위기의식과 더불어 최악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갱신하는 한일관계 속에서 혐한 및 재일코리안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극단적 현상이 나타날 것을 우려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발언이 근래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물론 타자에 대한 적대시는 향후 한국사회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인 화두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인문학의 신이란 게 있다면 그건 어쩌면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손님)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교수
저역서로 《일본 재발견》,《일본 정신 분석: 라캉과 함께 문화코드로 읽는 이미지의 제국》,《일본문화사》,《신도,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정신의 풍경》,《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