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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37호-미제레레, 시편 51편의 지워진 목소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7. 28. 15:54

미제레레, 시편 51편의 지워진 목소리


newsletter No.637 2020/7/28

 

 




17세기 초 이탈리아의 음악가 알레그리(Gregorio Allegri, 1582~1652)가 작곡한 <미제레레(Miserere)>는 떼네브레(Tenebrae)라 불리는 성주간(부활절 전 주간) 목, 금, 토 3일 동안의 성무일도에 사용되었던 곡이다. 처음에 악보를 따로 만들지 않고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만 불리웠던 일, (진위는 확실치 않은 이야기지만) 어린 모짜르트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이 곡을 듣고 전부 외워서 악보를 만드는 바람에 처음으로 바티칸 밖에 공개되었다는 일 등등이 항상 이 곡에 신비감을 더하는 요소로 언급되곤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음악”, 즉 무엇인가 “신성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대표적인 예로 이 곡을 들기도 한다.

이 <미제레레>가 성주간 성무일도에 사용되었던 이유는 이 곡의 텍스트가 ‘참회’의 모티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제레레>라는 곡명은 라틴어 시편 51편의 첫 구절 “Miserere mei, Deus, secundum magnam misericordiam tuam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느님, 당신의 큰 자비에 따라)”의 첫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윗은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라고 말한다. 다윗은 여기서 무슨 죄를 회개하고 있는 것일까.

시편 51편의 앞 부분에는 “다윗, 그가 밧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즉 <미제레레>는 사무엘 하 11장에 나오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고 나서 그녀를 일방적으로 데려와 자신의 잠자리에 들게끔 만든 후 일어난 일들- 밧세바의 임신, 이에 당황한 다윗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전장에 나가 있던 우리야를 급히 불러와 밧세바와 동침하게 만들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계략을 세워 그를 전쟁터에서 전사하게끔 만든 일 - 을 회개하며 야훼에게 바친 기도이다.

그러나 성주간 성무일도에 사용될 만큼 그리스도교에서 ‘참회’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는 <미제레레> 의 텍스트, 시편 51편 어디에서도 다윗이 ‘밧세바’에게 지은 죄를 직접적으로 참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윗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참회하며, 다윗의 하느님이 그러한 그의 “모든 죄를 지워 주고”,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주고",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여기서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고 자신의 위력을 사용해 그녀를 자신의 침상에 데려오고 자신과의 잠자리를 강요했던 일이 한 여인에게 얼마나 큰 폭력이고 죄였는지, 그리고 다윗이 이점을 그녀에게 뉘우치고 있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성서는 그리고 이 일화에 대한 후대의 해석은 놀라울 정도로 밧세바의 관점에 대해 무심하다. 심지어 후대의 해석 중 일부는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 의도적인 다윗에 대한 유혹이었다고 보기까지 했다. 서양 미술사 속에서 ‘다윗과 밧세바’라는 주제의 그림들을 찾아보면 램브란트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옷을 벗고 목욕하는 밧세바를 전형적인 유혹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으며, 또한 여성의 벗은 몸을 향한 남성의 관음적 시선이라는 구도 하에서 이 장면을 묘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성서로부터 시작해 후대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되고 해석된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철저히 다윗이라는 남성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다윗의 죄와 회개라는 그의 삶의 드라마, 그의 “위대한” 면모 - 설령 유혹에 굴복해 죄를 지었지만, 또한 하느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니 이 얼마나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인가라는 생각- 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그의 죄가 밧세바에게 어떤 죄인지, 이 모든 사건의 피해자 밧세바는 어떠한 감정으로 어떻게 이를 견뎌야만 했는지, 밧세바는 신에게 어떤 기도를 드렸을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묘사하는 데 있어 전형적인 유혹자의 프레임을 적용하거나, 혹은 그녀가 결국 다윗의 아내가 되고 후에 그녀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으니 다윗이 그녀에게 저지른 죄도 그녀가 왕후가 되고 왕의 어머니가 된 것으로 다 해결이 된 것처럼 이야기했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단지 다윗의 서사로만 이야기하고, 다윗의 회개를 오로지 하느님 앞의 회개로만 이야기해 온 전통이 해로운 것은, 수년간 자신이 담당하던 교회 신도를 성추행했던 한 목사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성추행 사건으로 목사직에서 사임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다른 교회를 세운 그는 이후 설교에서 자신을 ‘다윗’에 빗대며 자신 역시 다윗처럼 죄를 지었으나 하느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한다는 식으로 자신을 프레임화했으니 말이다. 이들은 모두 다윗처럼 하느님 앞에서는 죄를 지었고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하지만, 자신의 그 죄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 여성들, 그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입을 닫은 채 모른 척하는 이들이다. 분명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피해자에게 사죄하지도 않은 채 하느님에게, 다른 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들의 참회를 그 어떤 신학적 도덕적 명분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까.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이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초월적 감동’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이 소리의 초월적 감동은 아마도 <미제레레> 원문의 컨텍스트와 무관하게 계속 이어질 것이다. 원래의 컨텍스트와 무관하게 계속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예술의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문의 컨텍스트를 떠나 이 초월적 감동을 만들어내는 소리- 절망과 무력감, 그리고 그 속에서 신의 자비와 도움을 간구하는 소리가 진정 누구의 목소리인지,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 누구의 이러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점술의 사유와 이미지 사유>,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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