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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en에게 ‘종교전달(宗敎傳達)’하기, 感想과 私談과 雜說

 

newsletter No.651 2020/11/10

 




 

 



I. 감상: 당혹스러움

당혹스럽다. 요즘 학생들을 만날 때 자주 갖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강의실 안에서 모습이나, 강의실 밖에서 멘토-멘티 모임 또는 동아리 모임에서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온다. 나와 다르다는 이질감에서 온 당혹감이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SNS의 담벼락에도 남기지 않은 개인적이며 특수한 경험이니 일반화시킬 수 없다. 이런 사적 감정에서 기인한 사담과 잡설로 뉴스레터라는 공적 공간을 소비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요새 머릿속에 가장 자주 궁굴리는 단어가 ‘생태’와 ‘미디어’, ‘세대’이다. 기독교나 현대신학, 목회, 교육이라는 주제는 이 세 용어로 엮어진 틀에서 다루어진다. 이 틀에서 주제들과 어휘들이 날실과 씨실로 엮이면서 나름대로의 문양을 만들어 간다. 기독교를 공시적으로 보아도 통시적으로 보아도 그 문양이 동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문양의 특징을 꼽으라면 ‘변화(變化)’다. 영어 어감으로 하면 Variation, Transition, Transformation을 다 포용한 의미다. 뭐가 변한 것일까? 나는 지금 무슨 변화 가운데 있는 것인가? 내 당혹감은 이 변화의 와중에 생긴 것인가?


교육생태계가 변한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교육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은 여전히 동일하다. 20년 넘게 같은 건물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공간의 변화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과 학생이 바뀌었다. 내 생각이나 신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니 선생도 조금은 바뀌었다고 하겠다. 학생들은 해마다 바뀐다. 교육생태계에서 가장 큰 변화는 교육이라는 사건의 한 주체인 학생으로 보인다. 단순히 수업 구성원으로 학생이라는 주체가 바뀐 것이 아니다. 이전의 학생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 새로운 종류의 학생인 것이다. 나의 당혹감의 근원은 이 새로운 존재들의 낯선 모습에서다.

대학 졸업 후 이 개신교 생태계를 떠나본 적이 거의 없다. 20년 넘게 가르쳐온 현장은 신학대학교다. 거의 전부가 개신교인이고, 거의 대부분이 신학과 목회학을 공부해서 개신교 목회자가 되는 길을 걷는다. 성장 배경이나 장래 계획이나 관심사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활동 등을 고려할 때,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종합대학에 비하면 엄청나게 균질적인 집단이다. 해마다 같은 공통점을 지닌 동일한 속성을 가진 학생들이 들어왔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여전히 작년 학생들과 거의 비슷한 집단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학생들이 과거의 학생들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적어도 이들의 몇 년 전 선배들과도 구별되는 다른 세대임이 확실히 느껴진다. 신앙적 신학적 지향성 등 종교적 범주에서 차이가 아니라 그냥 인격 전체가 다르다. 다른 종류의 인간, 새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로 불릴지 모르지만, 더이상 나와 같은 부류의 존재는 아닌 것처럼. 뭐가 다른가?

II. 사담: 언어와 미디어

이번 학기 개설 과목 중 <인간과 종교>가 있다. 학부 신학과 필수과목이다. 이웃종교에 열린 태도를 가진 개신교인이 되길 기대하면서, 종교현상과 세계종교에 대해 입문적인 소개를 한다. 비대면 줌(Z00m) 수업으로 불교를 소개하기 위해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사용해 피피티(PPT)를 만들었다. 불교의 역사와 현황, 경전과 가르침 등에 대한 텍스트는 평소처럼 한글과 한자로 병기했다. ‘팔정도(八正道)’나 ‘삼법인(三法印)’ 등의 한자 병기가 학생들의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대면 수업하던 날, 학생들에게 한글과 한자 병기에 대해 물었다. 25명의 학생 가운데 한자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문이 교육과정에서 선택과목으로 된 이후 한문 교육을 제대로 받은 학생이 없었다. 한자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도교와 불교와 유교를 소개하고 그 가르침을 설명했다니 당혹스러웠다. 25명의 학생 모두 한문보다 영어가 익숙하고 편하다고 한다. 나에게 익숙하고 명료한 것이 그들에게는 낯선 암호였다.

이후 신학대학원 필수 과목인 <현대신학개론>에서 학생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60명의 학생 가운데 한자가 더 편하다는 사람은 5명이었다. 나머지 55명은 영어가 익숙하고 편하다고 했다. 질문을 하나 더 했다. 자료를 찾을 때 책과 디스플레이 중 어느 것을 먼저 찾는지. 디스플레이에는 스마트폰, 컴퓨터, 전자책까지 포함시켜 주었다. 60명 중 40여 명의 학생이 전자매체를 찾고, 책은 10명, 책과 전자매체 반반 선호가 10명이었다. 학생의 절반은 1990년대 이후 출생이며, 나머지가 그 이전이었다. 이들에게 외국어로는 영어를 선호하고 강력한 학습도구는 전자매체였다.

내가 속한 신학대학교는 다음 세대에게 개신교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서, 개신교공동체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 2000년 전에 벌어진 사건을 기반으로 형성된 경전과 역사와 전승을 가르쳐서 전달한다. 물론 그 전달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재구성된 결과물을 전달하고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런 전달 과정의 핵심에는 책이 있고, 책의 생태계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라틴어 등의 고전 언어를 자양분 삼아 구성되었다. 이게 여전히 유효할까?

III. 잡설: 다른 세대에게 종교전달하기?

『#i세대』는 진 트웬지(Jean M. Twenge)가 쓴 의 한국어 번역서다. iGen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자란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를 지칭한다. 이들에게 디스플레이는 정보와 지식을 얻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었고, 사물과 세상을 이해하는 창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창은 책이었다. 책으로 세상을 보던 사람이 디스플레이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책의 생태계 안에 있던 사람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생태계의 사람에게 물려받은 종교를 전달하고 있다.

내 생각은 문자와 어휘, 개념을 재료로 논리성과 조직적 체계성을 추구하도록 훈련되어 왔다. 전자매체에 익숙한 세대, 전자매체가 전달하는 멀티미디어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세대들에게 기독교의 종교경험을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한자가 낯선 사람에게 기독교의 경험과 가르침의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한자가 낯선 세대에게 종교를 전달하는 문제는 불교와 유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어 성서에 얼마나 많은 한자어가 쓰여 있는지, 신학과 교회에는 얼마나 많은 한자어가 녹아있는가. 국립국어원의 <표준어국어대사전>을 보면, 고유어가 약 75,000단어, 한자어가 235,000단어, 외래어가 24,000단어, 혼종어가 88,000단어이다. 한자어와 고유어나 외래어가 결합된 혼종어까지 포함하면 한자어는 우리말 어휘에서 압도적인 위상이다.

가끔은 영산강변을 자전거로 달린다. 가을날 코스모스가 핀 영산강변에서 들꽃 향기를 품은 가을바람의 감촉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에서 가을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영산강변의 느낌을 오감으로 회상한다. 이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동일한 장면을 볼 때 무엇을 경험할까? 동일한 디스플레이에 나타난 같은 화면을 보면서 다른 것을 회상한다면, 우리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 i세대에게 “종교전달하기”를 잘하고 있는지, 내가 적절하고 적합한지 지속적으로 자문한다. 내가 속한 교단의 올해 총대는 거의 전부가 남자로 평균 나이가 63세이고 이 숫자는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20년 전에 지도자가 된 사람들이 20년째 그대로다. 한국교회가 이민교회처럼 되어가고 있다. 이민교회는 언제 이민 온 사람들이 주 구성원이냐에 따라 지금도 여전히 각각 70년대, 80년대, 90년대 방식으로 예배를 보고 찬양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로 모인 배타적 집단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지도력도 80년대에 머물러 있는 산업화와 책이라는 미디어 경험을 공유하는 남성 중심의 배타적 집단이 되고 있다. 종교를 전달하는 교육기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신학대학이 급팽창하던 1990년대에 진입한 교수들이 만들어 놓은 교육내용과 방식은 신성불가침한 타부가 되었다. 지도력의 배타적 게토화는 몰락해가는 늙은 교회와 늙은 기관의 상징적 증상이다. 게토화된 성채에서 『기독교강요』를 쓴 27살의 깔뱅이나, <95개조 반박문> 을 쓴 34살의 루터가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신재식_
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저서로 《예수와 다윈의 동행》,《종교전쟁》(공저) 등이 있고, 논문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본 마음과 몸: 정경을 중심으로>, <한국개신교의 현재와 미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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