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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53호-통계 숫자에 가려진 삶의 이야기(narrative)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11. 24. 20:00

통계 숫자에 가려진 삶의 이야기(narrative)


newsletter No.653 2020/11/24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러나 수백만의 죽음은 하나의 통계일뿐이다.
(One man's death is a tragedy; the death of a million is a statistic.)"1)


이 말은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이 남긴 경구로 알려져 있다. 좋은 예는 아닐 수 있지만,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연일 집계되는 감염자와 사망자의 숫자를 접하다보니 이 구절이 떠오르면서 잡다한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난해 겨울, 우한 폐렴으로 불리며 시작된 코로나19 사망자는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에 비교될 만큼 엄청난 숫자라고 한다. 코로나19 실시간 상황판에 따르면 전세계 확진자는 58,981,921명, 사망자는 1,393,794명에 이른다.(2020년 11월 23일 오전 기준)


올해는 거의 매일 이 전염병의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의 숫자에 따라 사태의 추이를 살펴보고,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별 지침에 귀 기울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고통이 숫자로 치환되고, 또 그 숫자는 비감염자의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행동 수칙의 바로미터로 기능하는 측면도 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숫자는 인간 집단의 통치를 위해 불가결한 일임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저마다의 경험은 코로나19 종식과는 별개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목소리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정황도 함께 주목해봐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8월 ~ 1943년 2월)는 그때까지만 해도 불패신화를 수립하며 승승장구하던 히틀러 나치군의 기세가 한풀 꺾여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바뀌는 계기가 된 싸움으로 평가된다. 반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 전쟁에서 100만 명이 훌쩍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 종전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그 희생자들은 여러 매체의 내러티브 소재가 되었다. 많은 역사가를 비롯하여 극작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등 소위 이야기꾼들(storytellers)의 다양한 내러티브는 그때의 통계를 비극으로 생생하게 되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극작가 레조 가브리아즈(Rezo Gabriadze)의 인형극 <스탈린그라드 전투>, 안토니 비버(Antony Beevor)의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스탈린그라드에 보내는 새 연가(戀歌) Nuevo canto de amor a Stalingrado>, 독일의 요제프 빌스마이어(Joseph Vilsmaier) 감독의 <스탈린그라드>,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감독의 <에너미 앳 더 게이트 Enemy at the Gates>, 표도르 본다르추크(Фёдор Бондарчу́к)의 <스탈린그라드 Сталинград>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좀 단순하지만 이러한 내러티브를 나름대로 구분해보면 우선 안토니 비버의 경우처럼 전투일지, 군인들의 편지, 일기 등 다양한 자료에 입각하여 끔직한 전쟁을 재연하는 이야기가 있다. 또 마리오네트(Marionette) 극단은 희생자들이 못다 이룬 아주 소박한 꿈, 사랑 등 구체적인 여러 개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인형의 몸짓, 소리, 영상으로 공연한다.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슬픈 시처럼. 그리고 앞의 두 경우와는 다른 관점에서 소련체제에 충직한 작가들이 체제 옹호적인 영웅신화 만들기에 주력하는 내러티브를 소설로 낸 경우도 있다.

코로나19 통계에 가려진 삶의 이야기도 다양한 장르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로 이야기될 것이다. 전염병 희생자 개개인의 애끓는 사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결국 인류 전체의 집단적인 자각을 일깨워주는 반성과 성찰의 기회가 되고, 아울러 새로운 기원 신화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결국에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시(詩)는 세세한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통찰력있는 이해로 이어질 수 있는 방식으로 극도로 집중하면 우리 감각의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마지막 두 행은 미세하고 유일한 것을 변형시켜 이를 우주적 스크린 위에 투영한다. 이는 간과되거나 무시될뻔했던 것을 눈부시고 근사하게 만든다. 또한 작은 것과 거대한 것이 만나서 작은 것이 거대한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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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endy Doniger, The Implied Spider: Politics & Theology in Myth,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1; 최화선 역, 《암시된 거미 - 신화 속의 정치와 신학》, 이학사, 2020, 68-69쪽.

2) 아일랜드 시인 세이머스 하니(Seamous Heaney)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시 <도요새 The Sandpiper>에 대한 논평에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순수의 징조 Auguries of Innocence>를 끌어왔다. 위의 책, 61쪽.

 

 



 







 


하정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1920-30년대 한국사회의 '신화' 개념의 형성과 전개> , <근대 단군 담론에서 신화 개념의 형성과 파생문제>,〈신화와 신이,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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