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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58호-조약, 통역, 선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12. 31. 16:10

조약, 통역, 선교


newsletter No.658 2020/12/29

 





동아시아 특히 중국사의 결정적 분기점의 하나가 아편전쟁(1839-1842)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다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시진핑을 필두로 하는 현재 중국의 집권세력과 상당수의 중국인은 아편전쟁을 치욕의 역사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 이전의 역사, 즉 서구문명을 압도하는 중화문명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다양한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몽’이나 ‘일대일로(一帶一路)’와 같은 용어는 이러한 욕망의 표현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영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5개 항구의 개항 및 홍콩 할양을 주 내용으로 하는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아편전쟁이나 난징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난징조약이 체결되는 현장에 잠시 주목해 보고 싶다. 1842년 8월 29일, 영국 군함 콘월리스(Cornwallis)호 선상에서 체결된 난징조약에는 다른 조약들처럼 양국의 전권대사와 관련 인사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조약의 현장에 등장한 두 인물이다. 한 사람은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로 불리는 귀츨라프(K.F.A. Gützlaff, 1803-1851)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최초의 사제’가 된 김대건(1821-1846)이다. 귀츨라프는 영국 측 통역관으로 참여하였고 김대건은 프랑스 극동함대 함장의 통역관으로 참여하였다. 물론 난징조약의 당사자는 영국과 청나라였기 때문에 귀츨라프는 회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반면, 김대건은 제3자인 프랑스 측의 한 수행원으로 참관하였을 뿐이다. 당시 회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남아 있는데 귀츨라프는 등장하는 반면 김대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조약에서 두 사람이 차지하는 위상의 차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 필자의 머리에서 귀츨라프와 김대건은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귀츨라프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로 대변되는 미국 출신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잠시 한국을 거쳐 간 유럽 출신의 선교사이고,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로서 양자 사이에 어떤 연결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난징조약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궁금증이 생겼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인물이 난징조약이라고 하는 역사적 현장에 함께 있게 된 것일까?

귀츨라프는 프러시아 출신의 네덜란드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마카오로 거점을 옮긴 독립선교사다. 독립선교사는 생계비와 선교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의 통역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배는 중국 북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아편 밀수나 해로 측정과 같은, 당시에는 불법적인 상업적 군사적 행위를 하는 선박이었다. 그렇지만 선교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탑승하였다. 1832년 7월 로드 암허스트호는 산둥(山東)반도에서 방향을 틀어 황해도 해안으로 진출했고 7월 25일부터 8월 12일까지 충남 태안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한 후, 조선 국왕에게 통상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는 관리와 섬 주민에게 성서와 전도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보름 남짓의 이러한 전도 활동으로 귀츨라프는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고대도에는 그의 선교를 기념하는 기념교회와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당시 조선 정부는 외국과의 통상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배는 조선을 떠났고 귀츨라프도 마카오로 돌아갔다.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영국 점령지의 행정관과 정보장교로 일했고 난징조약 체결시 통역관으로 등장한 것이다.


귀츨라프가 조선 해안을 떠나고 4년의 시간이 흐른 뒤 또 한 명의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다. 이번에는 개신교 선교사가 아니라 가톨릭 선교사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P.P. Maubant) 신부다. 그는 해로가 아니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밀입국하였는데 현지인 사제 양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중의 하나가 김대건이다. 당시 15세였던 김대건은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중국 대륙을 횡단한 후 1837년 여름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5년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로부터 사제수업을 받았으며 중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기간은 대략 아편전쟁의 시기와 겹친다.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 극동함대 에리곤호의 세실(Cécille) 함장이 파리외방전교회를 찾아와 조선어 통역자를 부탁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였던 프랑스는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것을 보고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권과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였고 세실 함장은 조선과의 교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 통역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파리외방전교회는 모방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교회의 주요 지도자들이 처형된 기해박해(1839) 이후 단절된 조선교회의 상황을 파악하고 선교사를 비밀리에 입국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김대건과 함께 메스트르 신부를 함대에 탑승시켰다. 그런데 세실 함대는 조선으로 가기 전에 마닐라, 타이완, 상하이를 거쳐 난징으로 향했는데 난징조약에 참관하기 위해서다.(2년 뒤 프랑스는 청나라와 황푸(黃埔)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난징조약 참관은 이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이렇게 김대건은 세실 함장의 통역관으로 난징조약에 참관하게 된 것이다. 난징조약 체결 후 세실 함장은 조약에 조인한 중국인 고관들을 만났는데 이때도 김대건은 통역으로 참여했다.

그러면 조약체결 이후 두 사람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가?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귀속되자 귀츨라프는 영국 정부에 고용되어 홍콩에서 일하는 동시에 성서 번역과 반포 작업 등의 선교활동을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삶을 마쳤다. 헌신적인 선교사에서부터 제국주의의 앞잡이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이다. 김대건은 세실 함대가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조선으로 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로를 통한 입국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고 마침내 3년 만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입국한지 1년도 안되어 서해안에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군문효수형을 받고 25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김대건은 현재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 있고 탄생 200돌을 맞아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처럼 귀츨라프와 김대건은 매우 다른 삶의 길을 걸었지만 난징조약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점에 착안해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두 사람이 난징조약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통역관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조약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국가들이 협상하는 장이기 때문에 통역이 필수다. 통역전문가가 흔하지 않던 시절, 외국어 구사를 생명으로 하는 선교사나 유학생보다 더 좋은 대안이 어디 있었겠는가. 로드 암허스트호(아편밀수선)와 에리곤호(극동함대)에 선교사와 유학생이 탑승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처럼 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의 선교(종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통역(번역)을 매개로 조약(정치)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시대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이진구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
주요 저서로 《한국 개신교의 타자인식》,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자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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