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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이해는 지식권력의 해체로부터 시작된다


 

newsletter No.657 2020/12/22

 

 





이 글은 Rey Chow, “Where have all the Natives Gone?”(Displacements: Cultural Identities in Question, Angelika Bammer ed., Indiana University Press, 1994)을 읽고 쓴 짧은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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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민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고 묻는 레이 초우의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토착민이란 서구세계와 대항관계에 있는 제3세계를 의미한다. 레이 초우는 서구가 제3세계를 바라보는 모순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제3세계를 특수, 원시성, 신비로움, 미개함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말이다. 이러한 시각은 그 자신의 위치성과도 관련 있다. 그녀는 홍콩 출신 화교이며 미국 대학에서 비교문학과 중국 현대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초우는 이러한 위치성 속에서만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다. 미네소타 대학에서 중어중문학 전문가를 뽑는 면접에서 미국 교수가 중국인 지원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전형적으로 서구 지식인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제3세계에 덮어씌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초우는 미국인 교수가 중국인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 그 교수가 갖고 있던 이미지대로 중국인 면접자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태도 자체가 인종주의적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 교수가 중국이라는 세계에 대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토로한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미국 사회 안에서 타자 혹은 여성이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서양세계가 만들어낸 제3세계 토착민의 이미지는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토착민은 침묵당할 수밖에 없다. 제3세계 토착민의 존재란 서구의 ‘있음’을 증명하는 타자일 뿐이며 서구는 토착민의 결여를 채워주는 존재가 된다. 서구 지식인의 시선으로 제3세계 토착민을 해석하는 태도는 서구인이자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위치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로써 특정 지역 토착민의 고정된 이미지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와 서양 지식인의 시선은 포르노그래피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구의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을 고발하고 토착민을 복원하고자 했던 말렉 알룰라(Malek Alloula, The Colonial Harem)의 어설픈 시도는 프랑스인에 의해 제작된 알제리 여성의 모습이 담긴 그립엽서가 또다시 지식인의 비평담론 안에서 대상화되어 전시되는 비극을 초래한다고 초우는 이야기한다.

결국 제3세계 토착민의 이미지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토착민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할 필요가 없으며), 이는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라는 가야트리 스피박의 주장으로 연결된다.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 서구 지식인의 담론과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서발턴의 관계를 무시한 채, 서발턴이 자신의 음성으로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주장하는 스피박의 논의는 결국 지식인이 만들어놓은 지식과 이미지들을 포기해야 함을 말한다. 서구 제국주의 담론으로는 서발턴의 담론을 번역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것처럼 현대의 기술복제시대에 토착민의 이미지와 문화가 무수히 복제되는 상황에서 토착민만의 오리지널을 복원하고 맥락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비평가들은 상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룰라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초우는 이 글에서 서구 지식인들이 제3세계 토착민을 왜곡하거나 신성시하는 태도, 혹은 문화비평가들이 토착민의 문화를 맥락화하고 복원하려는 태도, 그 어디에도 토착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토착민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중국인 면접자는 미국인 교수의 어떠한 지점을 건드렸기에 그 교수가 언짢아했던 것일까? 서구 지식인으로서 그가 가진 지식권력을 제3세계인이 침범했기 때문이 아닐까. 고정관념과 헤게모니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던 미국인 교수는 지식권력 체계에 안주해 있는 서구 지식인일 뿐이다. 초우가 이야기하는 토착민 혹은 타자는 서구와 제3세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생성된다. 소수자로서의 타자는 늘 결여되어 있고, 교화와 계몽의 대상이 되며, 권력에 의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슬라보예 지젝은 타자가 지배담론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서발턴이 무엇을 하더라도, 어떠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용인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는 사실 어떤 금기가 기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서발턴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스피박은 서발턴의 삶이 너무 복잡하고 수많은 담론의 사슬로 덮여있기에, 서구의 비평이론으로는 재현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초우는 토착민의 침묵을 해석하기보다는 침묵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침묵 그 자체가 토착민이 배제되고 억압된 가장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에서 시작해야 다른 사회, 다른 문화, 타자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식을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진경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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