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와 진보, 한민족에 대한 왜곡된 논리
newsletter No.660 2021/1/12
2021년 신축년. 일제의 강점을 고려하면 이미 110년이 지났고, 1945년 남북 분단을 기준으로 하면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광복 이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 남한과 북한이 위치하다보니 한국의 현대사는 우리 민족이 바라던 이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세상이 한참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이념은 민족정체성과 민족자존에 뿌리를 두지 못하고, 아직도 냉전체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냉전 논리의 관성이 아직도 남아 심지어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 개혁과 수구의 이념들을 크게 왜곡시키고 있다. 이 같은 이념의 왜곡은 민족정기의 확립과 연계된 친일청산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동안 남한과 북한은 분단의 한(恨)이 많아도 각자의 생존을 보장받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안도의 숨을 쉬는가 하면, 때로는 약소민족이라 스스로 자책하며 예기치 않았던 동족상쟁과 같은 것까지도 지정학적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반도 개벽의 시기를 기다리며 역사의 뼈아픈 진실들을 그저 가슴에 묻기 바빴다. 그렇게 한 세기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 경제력 세계 10위와 군사력 세계 6위에 올랐다. 이 정도면 이제 과거와 달리 외부의 부당한 주권 규제나 민족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발언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러나 이미 낯설어 버린 민족의 자존과 자주를 다시 찾아 나서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과거보다도 더 치열한 인정 투쟁과 사회갈등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자신부터 의타적 지식과 권력, 특히 한국의 민족문화를 외면해온 한국의 종교 지식과 권력까지 다시 개벽할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북 갈등은 과거에 비해 크게 완화되었고, 또 지난해 코로나19의 성공적인 방역으로 한국은 전 세계에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었고, 국제적 위상도 높아져 선진국 협의체인 G7에도 올해 초청받았다. 그런 상황임에도 과거 권위주의 시대처럼 국내의 이념적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그 현장 중 하나가 친일청산 문제다. 지난해 8.15 광복절 계기로 진보측을 대변하는 김원웅 광복회장과 보수측을 대변하는 원희룡 제주지사가 첨예한 논쟁을 벌였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드러내놓고 말하기 껄끄러웠던 친일ㆍ반민족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친일 세력을 민족 분단에 기생해온 세력으로 규정하고, 해방 이후 친일 세력의 미청산으로 인해 민족정기가 확립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재 한국사회의 기저 질환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폭력적으로 해체하고 친일파와 결탁함으로써 아직도 청산이 되지 않은 오욕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친일·반민족 인사 69명이 지금도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으며 친일 행적이 드러난 안익태가 작곡한 노래가 애국가로 쓰이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친일ㆍ반민족세력의 행태가 일본 극우의 입장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민족의 자주적 역량 결집을 방해하며 우리 젊은이들 앞에 펼쳐진 광대한 미래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성 없는 민족반역자를 끌어안는 것은 국민화합이 아니고 정의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외쳤다. 또한 제주4·3항쟁을 비롯한 4·19민주혁명, 부마항쟁, 광주5·18항쟁, 6월항쟁, 촛불혁명 등은 일제강점에 맞섰던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며, 이들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온 주역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친일청산은 여당ㆍ야당의 정파적 문제도 아니고, 보수·진보의 이념 문제도 아니라고 하였다. 요컨대, 현재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는 보수와 진보가 아니고, 민족과 반민족의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대다수 도민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매우 치우친 역사관이라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태어나 보니 일본 식민지였고, 식민지하에서 달리 선택할 수 없는 인생 경로를 살았던 사람이 적지 않으며, 일제의 앞잡이들은 단죄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았던 것은 결코 죄가 아니며, 또 김일성 공산군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고 할 때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던 이들 중에는 일본 군대에 복무했던 분들도 있다며,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공을 보며 역사 앞에 겸허히 공과 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는 광복절 75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의 한 시기에 이편저편을 나눠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단죄를 받아야 하는 그러한 시각으로 역사를 조각내고 국민을 다시 편가르기 하는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을 보면, 보수측 원희룡 지사의 주장은 식민지 민중의 삶을 거론하며 해방 이후의 분단의 논리만을 강조한다. 주변 강대국이 바라는 이러한 분단유지의 관점은 현재 한국 보수측의 핵심 논리다. 그 반면에 진보측 김원웅 회장의 주장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거론하며 분단 이전 민족공동체의 논리를 강조한다. 주변 강대국에 대해 자기 발언을 하려는 이런 관점은 현재 한국 진보측의 핵심논리다. 결국 민족공동체와 분단국가, 어느 것에 더 중심을 두는가에 따라 이들의 이념 지향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보수와 진보의 이념은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보수는 개인보다도 공동체 자체의 생존과 번영에 관심을 가지는 세력이며, 진보는 공동체보다도 개인과 평등에 관심을 가지는 세력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보수는 민족화해와 민족통일과 같은 민족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진정한 진보는 민족이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권리와 평등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같은 이념의 구분은 미국의 보수를 자칭하는 공화당이 미국 국익을 최우선시하고,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이 소수 이민자를 상대적으로 더 보호하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현실은 보수와 진보의 본래적 함의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각 진영의 이념 지향은 소위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사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이 보수 이념을 담당하고 있는 반면, 새롭게 기득권을 가지려는 세력이 진보 이념을 맡고 있는 수준이다.
명분상으로 보면, 한국의 보수는 분단국가의 존속만을 주장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더 치중하고 있으며, 한국의 진보는 분단국가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 민족화해와 민족통일이 우선한다는 논리로 민족공동체를 더 중시한다. 이에 따라 보수와 수구, 그리고 분단 존속이 한 묶음이 되어 ‘보수’로 지칭되고 있고, 진보와 개혁, 그리고 통일지향세력이 한 묶음이 되어 ‘진보’로 불리고 있다. 이같이 민족공동체를 우선시해야 하는 보수가 남북 분단의 유지와 대결을 주장하는 반면, 개인의 인권과 권리를 중시하는 진보가 도리어 민족공동체의 문제를 전면에 앞세우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간에 민족의 문제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서 한민족의 정체성과 통합, 그리고 자주의 관점에서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한민족이 타자를 배제하는 패권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억압당하고 있는 자기 권리를 회복하자는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최소한의 권리인 온전한 세계국가 시민권을 확보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민족의 일을 인류공영이라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비하시키고, 혹자는 ‘상상의 공동체’의 일이라고 허구화한다. 이 모두는 민족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은 강자의 논리다. 인류의 역사에서 다른 나라를 위해 대가 없이 자신의 피를 흘리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인류공영의 보편성은 민족 자치라는 특수성을 통해서 실현되듯이 그 특수성 역시 인류공영의 보편성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승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논문으로 〈한국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반응형태 연구〉, 〈근대 종교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방안〉등이 있고, 저서로 《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 《한국신종교와 개벽사상》 등이 있다. 그 외 편저서로는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책임편집),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책임편집), 《한국민족종교문화대사전》(책임편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