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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56호-조커, 악당, 그리고 종교학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0. 12. 16. 17:59

조커, 악당, 그리고 종교학


newsletter No.656 2020/12/15

 




 스크린 속의 빌런, 조커

1989년 영화 《배트맨》의 광고 장면을 보면, 고담시의 높은 빌딩에서 배트맨이 조커의 멱살을 잡고 있다. 그리고 조커는 물어본다. "Who are you?" 이에 배트맨이 대답한다. "I'm Batman." 그리고는 손을 놓아버린다. 2008년에 개봉된 《다크나이트》에서는 배트맨을 연기한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보다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Heath Ledger)가 더욱 주목을 받는다.

조커는 DC코믹스의 배트맨을 상대한 빌런(악당)이다. 조커는 배트맨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새로운 해석이 가미되며, 전에 없는 새로운 악당으로 재창조되어왔다. 1989년의 조커는 잭 니콜슨(Jack Nicholson)의 연기를 통해 대중의 뇌리에 각인 되었고, 2008년 히스 레저의 조커는 지금까지 악당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뒤집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더욱이 조커 캐릭터는 수많은 창작물 속에서 정신병자와 사이코패스 그리고 예술가 등의 모티브가 되어 우리 앞에 자주 등장하며 주인공을 괴롭히고 대립하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빌런의 영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안티테제'로서 수많은 악당의 모티브가 되어준 조커의 탄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이는 우리의 이목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배트맨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커의 기괴한 몰골과 행동에 관심을 꺼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 각인된 조커는 끊임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이런 대중들의 조커에 대한 궁금증은 급기야 2019년 조커의 '숨겨진 이야기(substory)'가 영화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그것이 영화 《조커》이다. 이 영화는 한 평범한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사회를 넘어서는 악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의 조커 연기는 전작들과는 다른 조커만의 '우울'에 주목함으로써, 그 존재와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대중들은 주인공의 '안티테제'이자 악당으로서 조연에 불과한 조커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분출하는가이다. 지속적인 것은 계속되는 것이고 계속되는 것은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이유가 있다. 반복은 인간의 인위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커에 대한 반복적인 관심에도 이유가 있다. 관심의 이유는 조커가 관습과 규범으로 구획해 놓은 세상의 ‘경계에 선 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경계에 선 어릿광대


카드를 펼치면 54장의 카드가 섞여 있다.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클로버의 4개 모양이 각자 에이스에서 10까지 그리고 잭(J), 퀸(Q), 킹(K)을 포함해서, 13장의 카드가 한 벌로 구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13×4는 52이다. 그런데 카드는 2장을 더한 54장이다. 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또한 어디에도 속하는 두 장의 카드가 더 있기 때문이다. 그 카드가 다름 아닌 '조커'이다. 카드 속에 조커는 게임의 규칙을 어그러뜨리는 자이기도 하지만 게임을 새로운 상황으로 전환시키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카드에 나타난 조커의 모습은 어릿광대이다. 어릿광대는 고대 왕궁에서 왕의 권위를 조롱하고, 권세에 대해 무례한 말을 쏟아붓던 바보이거나 미치광이이다. 그는 권위를 우습게 깔아뭉개고 궁정의 관습과 예의범절을 무례하게 넘어선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들에게 잔인한 형벌이 가해지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에게 얼빠진 바보이거나 미쳐버린 광인이라는 조소가 되돌아온다. 그래서 어릿광대는 바보이자 광인이 된다. 그들이 이처럼 광우(狂愚)가 되는 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이라면 쉽게 어길 수 없는 관습과 규범을 넘어서고, 이를 농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치광이 바보'(광우) 광대는 사회가 제시하는 관습과 규범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임과 동시에, 그 경계에 선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어릿광대가 여분의 카드 2장인 '조커'인 것이다. 따라서 여분의 카드 2장은 경계를 넘어서는 자를 대변하기도 한다.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는 어릿광대 분장을 한 코미디언이다. 그는 이 직업을 좋아한다. 자기 스스로 남을 웃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해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은 그를 조롱하며 바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서는 시시때때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정신 상담을 받고 약을 먹는다. 그리고 아주 자주 그 웃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린치(lynch)를 당하기도 한다. 그렇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병이 있다는 설명이 적힌 카드를 내밀며 이해를 구한다. “나는 왠지 모르지만, 아무 이유 없이 웃게 돼요.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머리나 뇌의 문제라고 해요.” 이 짧은 문구 속에서 아서는 스스로 자신이 정신적 문제가 있는 '광인'임을 인정한다. 이를 본 사람들도 불쾌하지만 그 상황을 인정하고 넘어간다.

근엄한 현대사회에서 웃음은 때와 장소에 맞게 나타나야 한다. 웃을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별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감각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해 웃을 수 있는 상황을 구분하고 적절한 웃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현대인의 미덕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웃음을 액자화한다. 근엄하고 진지한 사회에서 벗어나 맘껏 웃을 수 있는 전시장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기품 있는 정장을 차려입고 오페라 극장에 앉아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면서 박장대소하는 고담시의 부르주아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평상시의 근엄함은 근대적 인간의 미덕이다. 이는 하나님의 소명으로 근검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현세적 금욕주의를 따르는 개신교적 덕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근대인들은 현실을 근엄하게 관조해야 하며,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헤픈 웃음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 때나 터져 나오는 아서의 웃음은 도무지 이성적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 심연의 표출이며, 욕망의 표출이다. 그래서 웃음을 제지당한 현대인으로서 아서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우수에 찬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본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무대'

궁중의 어릿광대는 히죽거리며 웃는 가운데 권위를 조롱한다. 하지만 그는 광인이고 우매하기에 넘어간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광우는 궁정으로부터 추방당한다. 고전주의 시대가 되면 광우는 감금당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근대적 이성과 합리성은 권위를 조롱하고 아무데서나 웃어젖히는 광대들을 쫓아내고 가두는 것이다. 이렇게 쫓아내고 버려진 광대들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연극무대에서나 자유롭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런 연극을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라고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의 희극, 코미디의 기원이다. 따라서 광대들은 이렇게 갇혀버린 무대 위에서 억눌린 욕망을 뒤로하고 애써 '우수'에 찬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 속의 코미디언이자 광대인 아서는 결국 그런 멜랑꼴리한 웃음을 집어치고 이렇게 외친다. "난, 내 인생이 희극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내 인생은 비극이었어." 갇혀버린 웃음 그리고 세상을 조롱하며 웃을 수 없는 어릿광대 아서는 억눌린 욕망을 넘어 자신의 비극에 맞서 근대가 설치한 무대를 걷어차 버린다.

근대의 합리적 이성은 오직 실증 가능한 것만을 합당하게 여긴다. 실증 가능한 결과란 예측 가능한 결과이어야 한다. 이것은 동시에 언제나 균질적인 결과들이 동일하게 생성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상은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상상은 결과를 내 올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하다. 이는 마치 광대들의 바보스럽고 멍청한 조롱처럼 현실적이지 않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이 근대적 합리성은 수학적 합리성이다. 이는 이윤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한 계산 시스템이다. 즉 투자를 결정하고 이윤을 계산해서 그것이 실증 가능하도록 만들고 결과들을 균질화해서 체계화하는 것, 이것이 근대적 합리성의 모토이자 요점이다. 따라서 실증 불가능하고 비균질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예측은 결과와 동일하고, 결과는 또한 예측과 동일한 균질적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근대의 균질적인 순환은 근대적 시간의 순환과 동일하다. 근대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이다. 근대적 시간은 언제나 동일하고 측정 가능한 균질적 시간이어야 한다. 이러한 시간은 인간의 개입을 불허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인간은 이러한 거대한 시간 속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여기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경험적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 또한 존재한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다. 이는 그가 거대하게 흐르는 시간에 틈을 내어 기회라는 '꼭지'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기회를 잡고 시간에 개입하여, 거대한 크로노스의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변경한다. 따라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이며, 경험의 시간이자 신화의 시간이 된다. 그리고 그런 카이로스의 시간은 종교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악당 자리에 선 종교학

근대적 이성과 합리성은 예측 불가능하며 비균질적인 상상을 배제해왔다. 이는 마치 광대들의 히죽거림과 조롱을 궁정 밖으로 쫓아내고 궁정을 근엄함으로 채운 것처럼, 상상을 바보스럽고 미친 정신병으로 규정해서 근대의 궁정에서 '소제(掃除)'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성에 묶인 상상력의 사유는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공적인 무대에서 퇴장해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배제된 상상을 근대적 합리성과 이성은 주술, 미신 등으로 부르며,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묶어 놓았다. 이젠 주술과 미신은 개인의 '종교'적 취향이라는 미명 아래 공적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하지만 종교학은 이런 배제된 상상을 공적인 영역에 불러내서 논의하는 학문이다. 이는 은연중에 배제되고 금기시되는 근대적 규범과 관행을 넘어서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 이는 정신 나간 어릿광대의 바보스러운 장난일 수도 있으며, 짓눌린 욕망 속에서 우수에 찬 웃음으로 바라보는 악당 조커의 분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종교학이 디딘 자리는 그런 장난스러운 자리일 수도 있고, 악당의 자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태수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근대적 문자성과 개신교 담론의 형성>, <근대 소리 매체(라디오, 유성기)가 생산한 종교적 풍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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