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상주 시기 청동기를 관람하고 들었던 생각
newsletter No.667 2021/3/2
1976년 12월 중국 부풍(扶風) 장백(莊白)이란 곳에서 서주(기원전 11세기-771) 청동기가 대량으로 발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농부들이 밭을 갈다 우연히 청동기 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고고학자들이 다시 발굴 작업을 진행한 결과 102기의 청동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103기에 달하는 청동기는 단일 지역 발굴 성과로는 유례없는 규모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청동기는 사관이었던 미씨(微氏) 일족이 수 대에 걸쳐서 자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주조한 것이었다.
원래 미씨 일가는 출신이 상 왕조(기원전 16세기-11세기)의 귀족으로서 ‘미(微)’라는 지역을 봉지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 왕조의 멸망은 이 가족이 서주의 본고장인 이곳 부풍 지역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주에서 사관의 직을 담당했던 미씨 집안은 왕실의 신임을 얻으며 날로 번창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가문의 보배로 여겨지던 100여 점의 청동기를 땅속에 숨겨두고, 그동안 정 붙이며 살고 있었던 곳을 떠날 때까지는 말이다. 서주의 붕괴는 미씨 일족이 이렇게 제2의 고향을 떠나게 만든 계기였다. 이들이 남겨 놓고 떠난 청동기에는 만대에 걸쳐 자자손손 이 기물을 이용하여 조상께 제사를 지내리라는 염원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상대와 주대의 찬란했던 청동기 문화가 남긴 유산은 역사의 잠재력으로 남았다. 한나라에 와서 상주 시기 청동기는 상서로운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고대 청동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어김없이 국가적인 관심사를 끌어모아서는, 연호를 바꾸기도 하고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둥 일대 큰 소동이 벌어지곤 하였다. 운이 좋게도 이러한 기물을 개인적으로 소유한 귀족들은 자신의 사후 부장품으로 껴묻어 주기를 바라는 일도 있었다. 한나라 귀족의 무덤에서 발굴된 상주 청동기는 현재가 과거의 모태이자 안식처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송대는 상주 청동기를 학문의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끌어당긴 시대였다. 여기에 강력한 동력을 제공한 요인 중에 호고주의(好古主義)를 빼놓기는 어렵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하상주 삼대를 본받아야 할 이상으로 삼는 태도인 호고주의가 비단 청동기에 국한해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주 청동기는 호고의 태도가 실천에 앞서 인식의 확장을 요청하는 분위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물이었다. 상주 청동기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조사, 분류, 해석 작업이 이루어지고 연구 성과는 책으로 편찬되었다.
하지만 상주 청동기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이를 통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반응하였다. 부족한 기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도굴이 성행하였고, 위조 수법은 날로 정교해졌다. 게다가 동전을 만들기 위해서 청동 기물을 녹이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상주 청동기를 구매하기 위하여 지불했을 막대한 금전 가치는 부와 지위가 호고주의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청대는 송대에 기반을 다진 금문학이 외연을 확대하는 시기였다. 여러 금문학자가 다양한 종류의 저술을 발간하였다. 오늘날 상주 청동기와 금문을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송대와 청대에 저술된 자료들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학술적 분위기는 청말 국제 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청나라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각축은 상주 청동기의 운명을 낯선 세계로 이끌었다. 이때부터 상주 청동기는 서구와 일본의 관리, 선교사, 학자, 사업가, 골동품상 등의 손에 수집되어 해외로 대량 반출되기 시작했다. 국외로 나간 상주 청동기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기증, 판매, 전시되기 시작하였으며, 개인 소장품으로 보존되는 사례도 있었다. 서구와 일본에서 상주의 청동기 연구가 근대 초기부터 뿌리를 내렸던 것은 이처럼 실물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상주 청동기는 중국 고대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전 세계 고대 문명에 관한 연구는 주로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서 서구학자들이 주도하였다. 중국 고대 문명도 그런 궤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 이규경(1788-미상)이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중국 청동기에 관한 항목이 있다. 〈삼대, 진, 한 고기 변증설(三代秦漢古器辨證說)〉이란 제목의 항목은 삼대 이래 주조된 청동기에 관하여 상세한 정보를 전한다. 하지만 이규경이 직접 실물을 보고 조사한 결과를 기술한 것은 아니고 중국에서 넘어온 서책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규경은 조선 지식인의 저술도 참고 자료로 인용하였다. 그중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발췌한 대목을 보면, 중국에서 유리창(琉璃廠)이나 융복사(隆福寺), 홍인사(弘仁寺)의 장터에서 청동기가 매매되었던 현실이라든지, 원래는 제사용이었던 청동기가 꽃병으로 전용되기도 한 현실 등을 짐작할 수 있다. 박지원은 당시 청나라에서 발간된 청동기 저술을 알고 있었고 실물을 직접 경험하였다. 이규경도 박지원처럼 북경을 다녀온 이력이 있으므로 그의 글이 오로지 다른 사람의 책에 의지해서 기술된 것이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실에는 상주 청동기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총 몇 점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전시장에 나와 있는 것은 6점이다. 주로 2000년대 이후에 구입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기 옆에는 영국 박물관에서 대여한 청동기 11점도 자리를 잡고 있다. 약속한 대여 기간이 종료되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 태어난 본고장과 상관없이 세계 각국을 떠돌고 있는 상주 청동기는 그것을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물로 다가갈까 상상해 본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상왕조의 인간희생제의에 관한 연구: 전쟁, 도시, 위계를 중심으로〉, 〈西周 시기 신 · 인간 · 동물 범주에 관한 연구: 청동기 金文 및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