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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69호-고도로 매개된 종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3. 16. 21:02


고도로 매개된 종교 

 

newsletter No.669 2021/3/16

 




나는 지난번에 기고했던 뉴스레터(646호)에서 코로나시국에 일시적으로라도 모든 종교활동을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신앙적 이유를 들어 거부하는 발언들을 다소 신학적/규범적으로 비판하는 과정에서 ‘비대면 예배도 충분히 예배가 될 수 있다’라던지 ‘온라인 예배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와 같은 진단도 시작단계에서 물론 필요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논의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배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매개된 종교행위’가 실용적 측면과는 별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경이로운(marvelous, awe-inspiring) 것으로서, 종교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개된 소통(mediated communication)은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서 일종의 신(神)적인 것이기까지 하다는 첨언을 하고 싶다. 즉, 매개된 소통 그 자체가 다른 종교들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신적인 속성(divine attribute)을 지니며, 또 그렇기 때문에 매개된 소통의 장은 각종 악용으로 인해 병든 부분들로부터 더욱 회복되어야 하고 또 해방되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 글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만 기술한 후, 필자의 학위논문 일부와 여러 해외학자들의 연구물에서 이미 많이 다루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러나 코로나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개신교와 온라인종교에 관한 논의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도 종교와 미디어에 관한 문제를 개신교를 중심으로 학술논문이 아닌 조금 더 대중적인 글을 통해서도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해당 주제에 관한 몇 가지 접근방법과 함께 다소 규범적/신학적인 주장도 펼쳐보고자 한다.


종교와 문화, 종교와 과학, 종교와 기술 등 ‘종교와 무엇’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흔한 방식들 중 하나가 일종의 분류체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개신교계열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제 그 이름만 들어도 식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많이 언급되어온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의 저자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취해왔던 문화와의 관계를 크게 나누어 (1) Christ against Culture (기독교와 문화와의 대립관계), (2) Christ of Culture (문화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기독교), (3)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서로 조화될 수 없지만 동시에 공존하지 않을 수도 없는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기독교와 문화), (4) Christ above Culture (문화의 영역보다 위에 있는, 즉 서로 독자적 영역에서 존재하는 기독교와 문화), (5)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문화를 더 선한 방향으로 변혁하는 기독교), 이렇게 다섯 가지의 접근을 취해왔다고 주장했으며, 본인은 궁극적으로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기독교를 지향했다. 이러한 니버의 분류법과 지향점은 이후의 학자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대안적 분류법을 제시한 Craig Carter의 Rethinking Christ and Culture라는 책이나 이러한 분류체계를 인위적으로 상정한 후 그 중 특정 접근을 선호하는 방법론 자체가 현상분석에 도움은 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교리적 발견을 중시하는) 조직신학적 접근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 성서학자 Donald Carson의 Christ and Culture Revisited과 같은 책들이 잘 알려져 있다.

비슷하게 Jeremy Stolow라는 종교와 미디어학자는 Keywords in Media, Religion, and Culture라는 공저서에 기고한 장에서 종교와 기술(테크놀로지)간의 관계에 있어서 크게 (1) Religion versus Technology (기술과 대립하는 종교), (2) Religion and Technology (필연적으로 기술을 활용하며 기술과 공존하는 종교), 그리고 (3) Religion as Technology(기술로서의 종교, 즉, 종교자체의 기술적 속성을 강조한 관점)라는 일종의 점진적 분류법을 제시하였으며, 다른 논문에서도 비슷한 논지로 Religion as media(미디어로서의 종교)의 접근법을 주장하였다. 개신교의 관점에서 테크놀로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시각, 즉 Stolow의 분류법상 (1)의 접근방식은 아마도 이전까지는 기존의 보수적 교회들 사이에서 매우 (또는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었던 시각이며, 분명히 존재하는 테크놀로지의 위험성(?)을 고려한다면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기만 한, 그저 무시할만한 접근은 아니다. 개신교와 정보기술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여전히 가장 자주 언급되는 학자 중 한 명인 Quentin Schultze의 Habits of the High-Tech Heart는 이러한 보수적 관점을 전개한 가장 유명한 저서들 중 하나로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의 개신교상황이라는 맥락에서는 Stolow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접근방식이 제공하는 통찰이 매우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이 관점들을 개신교에 적용해보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 역시 (어느 분류법이나 그렇듯) 놓지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개신교와 미디어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단순화된 분류체계를 제시해보려 한다.

(1) 개신교 속의 미디어
“교회 속의 미디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는데,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미디어 사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접근으로서, 주로 어떻게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교, 전도, 훈련과 양육 등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사역,” “양육”과 같은 단어들은 우리나라 개신교에서 자주 쓰는 일종의 내부 용어로서 – 약간 냉소적인 영어 표현으로는 Christianese 라고도 한다 – 외부인들이 자주 쓰는 일상용어는 아니다). 영화, 대중음악, 소셜미디어와 각종 동영상 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들은 현재 개신교가 미디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코로나 시국에 온라인 종교활동을 통해 적절하게 대응하고자 했던 많은 교회들이 가장 많이 씨름했던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나와 같은 연구자들이 “저는 종교와 미디어를 연구합니다”라고 말할 경우 가장 흔하게 오해를 받는 부분도 바로 이러한 접근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여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 그러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좀더 사람들한테 감동을 주는 기독교영화를 만들까를 고민하는 사람이구나’).

(2) 미디어 속의 개신교
어떻게 보면 ‘교회 속의 미디어’의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일반 시민들이 시청하고 소비하는 뉴스나 영화, TV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또는 소셜미디어 등에서 자주 보이는 개신교에 대한 담론 등 ‘교회 밖’에서 미디어를 통해 구성하는 개신교를 들여다 보는 접근이다. 위의 (1)의 접근이 ‘저는 종교와 미디어를 연구합니다’라는 발언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라면, 이 (2)의 접근은 실제로 종교와 미디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취하는 접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 밖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개신교가 정말 개신교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느냐”와 같은 질문은 당연히 예상되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 또는 기대감으로 교회 밖 미디어 속의 개신교를 살펴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작자들과 수용/청취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바라보고 있는 개신교의 주요한 단편을 파악하는 등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참고사항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을 취하는 이유가 더 크다.

(3) 미디어로서의 개신교
마지막 접근인 “매체” 또는 “매개체”로서의 개신교가 이 글에서 내가 가장 강조하고픈 접근인데,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Jeremy Stolow의 관찰을 적용하여 개신교라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미디어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며, 더 나아가 각종 매개, 즉 mediate (명사인 media의 동사형)를 하는 주체라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이를 위해 우선 ‘미디어’라는 개념의 정의를 간단히 살펴봐야 하는데, 한 마디로 media는 medium의 복수이며, medium(매체 또는 매개체)은 말 그대로 mediate(매개)를 하는 것을 말한다. 즉 핸드폰을 통한 문자메시지만이 미디어가 아니라 글자/문자 그 자체가 매체이며, 음악만 매개체가 아니라 악기 역시 매개체인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인간의 각종 언어와 몸짓, 또는 의상과 같은 사물 등을 이용한 모든 소통행위가 매개된 소통행위라고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정보 또는 의미의 전달과정에 있어서 중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미디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고도로 매개된, 그리고 매개하는 종교이다!” 개신교에서 신에 대해, 신앙에 대해 논할 때 결국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료가 무엇인가? 그것은 글로 적혀있는, 그것도 지금의 내가 아닌 매우 오래 전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문화적 맥락들 속에 처해있던 여러 대상들을 일차독자로 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다수의 저자들에 의해 파편적으로 기록된 것들을, 또 다시 여러 사람들이 수집하고 필사하며, 또 번역하여, 각종 물리적 또는 비물질적 형태로 전파되고 배포된, 다시 말해 매우 고도로 매개되고 매개된 자료, 즉 성경, 또는 성서이다. 개신교적 입장에서의 규범적인 얘기지만, 만약 어떤 개신교인이 “나는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과 같은 방식으로 신과 직접 소통한 결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이러한 비밀 메세지를 받았다”라고 주장했는데, 정작 그 메시지가 누가 봐도 성서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기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고도로 매개된 자료인 성서가 아니라, 이른바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의 주장이라는 것이 정통 개신교의 사상이다. 이는 성서자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의견의 불일치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보는 것이 Sola Scriptura (오직 성경)를 외치는 개신교의 공통된 입장이다.

한편, 논란을 야기하는 특정 개신교발 종교지도자들이 신과 자신간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자주 들먹이는 직통계시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일종의 표본으로 삼는 성서 속 예언자들의 전통이나 묵시문학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고도로 매개된 형태의 소통이라는 것을 읽어낼 수가 있는데, Grant Osborne의 요한계시록 주석 초반부에서 이러한 점을 잘 부각하고 있다.1) 그래서 비슷한 성을 가진 Lawrence Osborn이라는 신학자는 “매개되지 않는 계시는 없다”2)라고 까지 주장했다. 이러한 관찰은 대중문화에서 종종 활용되는 모세와 야훼 신과의 소통도 마찬가지이며, 역시 대중문화에서 차용하기 좋아하는 천사(ἄ
γγελος, 영어단어 angel의 어원이며 일차적 의미는 메신저, 즉 ‘전달자’, 또는 ‘소식꾼’으로서 초자연적 존재만이 아닌 사람에게도 쓰이는 단어이다)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매개된 소통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를 지칭하는 ἀπόστολος라는 단어 역시 apostle의 어원으로서 ‘보냄을 받은 자’, 메신저 등의 의미로 쓰였다).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은 저자들이 특정 독자들을 위해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편지’들이 현재 기독교 성서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 역시 기독교에서 매개된 소통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삼위일체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신과 인간사이의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도 되새겨볼 일이다 (사실 이 삼위일체의 교리는 ‘매개성’이 기독교에서 믿는 신의 핵심적인 내재적 속성임을 말해준다. 혹시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는 성서본문이 있는지 궁금한 독자는 마3:17, 요15:26, 16:13-14, 딤전2:5 등을 참조).

역시 규범적인 얘기지만, 기독교에서 신이 세상과 함께 사람을 창조하였고, 역시 사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일한다는 신앙의 다양한 함의점들, 예를 들어 힘있는 자들의 횡포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 역시 사람을 통해 이루어간다는 보편적 믿음이 가져다 주는 함의점들을 생각해 보아도 “신은 고도로 매개된 소통을 추구한다”는 고백적 주장은 개신교전통에서 봤을 때도 충분히 지지를 얻는다. 마찬가지로 신이 원하는 정의롭고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정당하게 보호받을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 공동체의 모범을 제시하여야 하는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교회 역시 사람을 통해 신의 뜻을 매개하고자 하는 구조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구성원들을 묘사할 때 그리스도의 ‘편지’ (ἐπιστολὴ, ‘서신’으로도 번역되는 영단어 epistle의 어원)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고후 3:3)도 이러한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개신교의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종교개혁 역시 신과 인간사이의 매개물을 모두 제거하고 신과 “직통하는” 관계를 추구한 것으로 보는 것보다는, 사제들의 의한 ‘매개의 독점’에 저항하고 오히려 매개의 다원화, 민주화를 추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인쇄술이 결정적인 변수였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이렇게 볼 때,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 전통은 물론이거니와 개신교의 입장에서도 “신은 미디어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생각에 대해 전혀 불쾌해 할 필요가 없다”3)고 말한 나의 지도교수 John Durham Peters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실 성서의 서사 안에서도 신이 구름, 바람(소리), 빛, 불과 같은 자연사물 및 사람과 동식물, 그 외 신화적 생물까지도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매체로 이용하는 예가 매우 많다(출 3:2-3, 13:22, 40:34, 왕상 19:11-13, 욥 40, 시 8, 19, 104, 눅 2:9, 행 2:2-3)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은 멀티미디어 유저다”라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신이 이러한 존재라면, 적어도 그 신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종교공동체는 매개된 소통행위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나 그저 실용적 차원에서의 활용, 또는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정도의 시각을 넘어서서 매개체가 개입되는 신앙, 즉 미디어와 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다각적 사유와 함께, 매개된 소통이라는 것이 장려하는 습관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매개된 소통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 특히 의미해석에 있어서 – 노력하도록 요구되는 부분들은 무엇이 있는지, 또 매개된 소통이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또한 신(神)적 속성을 지닌 매개된 소통이라는 행위에 대한 경이로움, 감탄을 회복해야 하지는 않을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자꾸 들려오는 왜곡된 미디어사용의 비극적인 사례들로 인해 슬퍼하고 분노하는 신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종교적/신앙적이고 규범적인 주장을 해보며 종교학보다는 차라리 신학적 시도에 더 가까운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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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f the New Testament 시리즈의 Revelation (2002) 54쪽 참조.
2) The Unseen World: Christian Reflections on Angels, Demons, and the Heavenly Realm (1996)의 41쪽 참조.
3) The Marvelous Clouds (2015) 372쪽 참조.

 

 

 







 


홍승민_
고려대학교 국제학부/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강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종교와 미디어, 그리고 문화간의 접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의 종교와 한국의 문화에 관한 과목들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논문으로 “Contrapuntal Aurality,” “Exegetical Resistance,” “Uncomfortable Proximity,” “Punching Korean Protestantis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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