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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87호-시작을 다시 생각한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7. 21. 14:56

시작을 다시 생각한다

 

news letter No.687 2021/7/20






출발은 털끝만한 차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간격이 벌어진다는 고사성어가 있다. ‘호리지차(毫釐之差) 천지현격(天地懸隔)’이란 사자성구다. 여러 면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시작의 중요함과 그 결과로 빚어진 사태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나는 평생 다른 학문 분야는 거의 생각지도 못했고 종교학과 불교학을 통해 세상을 보고 탐색하는 길에 들어섰다. 소위 불교학을 전공으로 삼았고 그 틀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 했다. 당연히 불교의 학문적 전개를 충직하게 따랐다고 생각한다. 처음 불교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을 때 이 분야가 요구하는 학문적 요구, 그 다양한 접근 방법에 아연했지만, 다방면에 걸친 분야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교학을 진척시킬 수 없다는 도발에 대해 젊은 흥분감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담긴 한문은 물론 불교를 담지한 수많은 고전어 가운데 어느 한두 고전어를 익히지 않으면 한 걸음도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 모든 일은 나의 멘토 고 이기영 교수의 가이드를 충직하게 따른 결과였다. 주지하다시피 이분은 역사학을 전공하다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전격적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아직도 서구 불교학에서 대체불가(irreplaceable)라는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에띠엔 라모뜨 (Etienne Lamotte, 1903~1983)에게서 서구 불교학의 연구방법을 터득하고 그 결실로 학위논문 <참회(懺悔)의 기원; 회개(悔改)의 불교적 양태(Aux Origine du “Tch’an Huei: Aspects Bouddhique de la Pratique Penitentielle, 1960)>를 제출하였는데 이 논문은 철저한 문헌 연구를 통해 ‘참회’가 한문과 산스크리트어의 합성어이고 ‘자신을 탓하는’ 종교 행위임을 밝혔다. 이제는 어느 종교에서나 사용되는 어휘가 되었지만 ‘참회’는 ‘참고 인내한다’는 종교적 내용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불교적 용어다. 그는 산스크리트나 팔리, 티베트 경전의 해당 전거를 광범위하게 활용하며 논문을 작성하였다. 라모뜨의 제자로서 서구 불교학의 연구방법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의 학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는 아마도 192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한 김법린(동국대 총장 역임)이 인도학-불교학자 실벵 레비(Sylvain Lévi, 1863~1935)의 지도 아래 ‘유식 20송’에 관한 논문을 쓴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 나온 언어-문헌학적 방법에 의거한 서구 불교학의 결실일 것이다. 이기영의 이 연구는 이후 한국에서 서구 불교학의 계보를 잇는 역할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학위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고 이기영은 1960년대 초반 서울대 종교학과에서 자신의 강의교재로 한번 사용했을 뿐, 더 이상 이 논문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원효연구에 몰두하며 원효를 일약 학계의 스타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 두 분보다 먼저 서구 불교학을 나름대로 소화하고 있던 일본의 근대 불교학이 일제강점기 재일 유학생/승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우리의 근대 불교학은 서구 불교학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영향 아래 전개되었으며 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곧 서구 불교학은 외진 뷔르누프(Eugene Burnouf, 1801~1852)에 의해 시작되고 그 적통은 라모뜨에 이르고 한국 불교학 역시 서구/일본에서 훈련받은 중진학자/승들에 의해 이러한 계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나의 의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불교연구는 이 막대한 연구분야, 곧 언어-문헌학은 물론 역사, 문화, 철학 등 소위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연구분야가 동원되지 않고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런 시발점을 어느 한 개인의 언어-문헌학적 업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학문적 천재라는 말도 가능하니 어느 한 개인의 뛰어난 업적의 파급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또 한 사람의 영향이 후대에 이르러 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확대되면 그 분야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뷔르누프는 분명 뛰어난 학자이고 전무후무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이 시작’을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학자의 업적에 대한 시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근대 불교학은 서구의 창안”이라는 틀에 갇혀서는 불교학이 자유스러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 구체적 실천과 현장을 끼고 있는 동북아 불교의 경우, 불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발단을 어느 곳에 둘 것이냐 하는 점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불교문헌을 장악한 서구 학자들에 의해 ‘문헌 속의 불교’나 ‘책상 위의 불교’로 나타난 오늘날 불교학의 위상을 동아시아 불교학자들은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산스크리트나 팔리 불전, 티베트 불전을 읽고 분석해 내지 않으면 마치 무엇이 결여된 것처럼 여기는 오늘날 불교학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한때 세계불교학회장을 지냈고 또 티베트 불전연구로 상당한 실적을 쌓은 뤼에그(David Seyfort Ruegg)는 불교란 “종교이고, 철학이고, 종교이자 철학”이라는 (서구적 정의에 따라 정체성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학문체계가 아니라 삶의 한 방안(a way of life)일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불교연구는 ‘삶의 방안’의 연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서구 불교학은 자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혀 다른 학문 분야들을 교배시킨 것처럼 들리는 ‘불교-신학(Buddhist Theology)’이라는 새로운 조어(造語)는 불교를 언어-문헌학적 수렁에서 끄집어내는 역할을 시도한다. 또 언어-문헌학적 판독이라는 기본적 작업을 일상의 사유나 하루하루의 행동 준칙으로 풀어놓으려 한다. 예컨대 중론(中論, Madhyamaka)은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모든 것은 공(空, Sunyata)이니 실체가 없고 결국 변하고 없어지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말(言表)’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되묻는다. 소위 공의 주장/언표의 불가능성을 묻는 것이다. 이제 서구의 논문들은 이러한 현실 부정의 주장이 현실 긍정의 근거가 됨을 따지며 그 정당성을 타진한다. “중관 사상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가(How Do Madhyamikas Think? - Tom J.F. Tillemans)”를 묻는 것이다. 중관사상은 무/공의 형이상학인 것만이 아니라 나의 삶의 현장이게끔 하라는 말이다.

나의 멘토인 고 이기영 교수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단 한번만 서구적 방법론에 의한 강의를 펼친 후, 또 흔히 해외 유학의 결실을 번역 출간하는 일을 마다하고, 우리 전통의 불교 즉 원효를 내세운 점을 나는 이 맥락에서 이해한다. 그런 이해는 나의 아전인수일수도 있지만 오늘 불교학 현장의 시의에 알맞는 문제제기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자문화권 불교학의 시발은 달리 탐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불교학의 시작을 생각하며 내 멘토의 불교학의 전환을 생각하고 또 궁극적으로 서구 불교학과의 현격한 차이를 되짚어 보게 된다.

* 오래전에 시작한 이기영 교수의 학위논문 번역이 금년 겨울 완료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민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주요 논문으로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불교에서의 인권이란무엇인가?>, <백교회통-교상판석의 근대적 적용>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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