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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88호-조선시대 종묘 신당(神堂)과 수복(守僕)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7. 27. 17:40

조선시대 종묘 신당(神堂)과 수복(守僕)


news letter No.688 2021/7/27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종묘(宗廟)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모두 83위의 신주가 봉안된 이곳은 조선 국가를 표상하는 최대의 제향 공간이었다. 이러한 종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 유래를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사당이 하나 있다.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정을 모신 곳인데 대개 ‘신당(神堂)’이라 부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신당에 봉안된 영정은 한양에 새로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와 떨어졌는데 이에 놀란 군신들이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 왕을 모신 사당 내에 공민왕 사당이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려 공민왕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신당은 군신의 의리를 배반한 태조의 고뇌와 죄책감을 표현하고 위로받기 위한 곳으로 비친다. 그러나 신당이 언제부터 이곳에 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관아(官衙)의 조금 외진 곳에는 이런 신당이 종종 있었는데 부군당(府君堂)이라 불렀다. 부군(府君)이란 중국 한나라 때 태수의 존칭이고 부군당은 임지에서 죽은 부군을 모신 사당이라고 한다. 또는 남근을 걸어둔 신당이란 의미로 부근당(付根堂)으로 부르기도 했다. 남근에서 짐작하듯 부군당에는 여신이 모셔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영, 단군, 공민왕 등 남성의 역사적 인물도 부군당의 신으로 등장하였다. 관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이 부군당은 이서배(吏胥輩)들의 사당이었다. 이서배들은 중앙과 지방 각 관서에 근무하던 하급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품계가 있어 그에 따라 승진하고 여러 관아로 옮겨 다니는 일반 관원과 구별된 중인(中人)이었다. 이들은 특정 관서가 요구하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기도 하고 토박이의 텃세도 지녔다. 부군당은 이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사당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새로 부임한 관원들도 이곳에 신고식을 거행해야 할 정도로 부군당의 위세가 높았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역임하는 관청마다 부군당을 불태워버렸다는 어효첨(魚孝瞻)의 영웅담처럼 부군당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관리는 외면하고 방치하였는지 조선후기까지도 많은 곳에 부군당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유교 사전(祀典)에 속한 제사에 제관이나 집사로 참여하며 국가의 공인으로 자처하던 관리가 있었다면, 공민왕, 최영, 임경업 등 비운의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위로받으며 살았던 이서들이 있었다.

조선시대 종묘에 관원이 있었지만 이서들은 없었다. 대신 30명 가량 있었던 수복(守僕)이 종묘의 일을 도맡았다. 당을 수호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일은 수복(守僕)의 몫이었다. 수복은 관에 소속된 노비이다. 국가의 주요 사당을 지키던 노비라고 생각하면 된다. 후기로 갈수록 양인의 비중이 늘지만 관노의 성격을 벗어버리진 못했다. 종묘 외 문소전, 왕릉, 진전, 문묘 등에도 있었고, 국가 제사 때 제물을 공급하던 봉상시에도 수복이 있었다. 이들은 사당 제일 가까운 곳에서 수호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종묘 신당 관련 기록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것인데 그중에서도 이들 수복이 작성한 『종묘일지』와 『대방하기』 등의 문서에 나온다. 종묘의 신당도 관아의 부군당처럼 종묘에서 근무하던 비천한 사람들이 주관하던 사당이었다.

조선시대 ‘제사’는 공적인 사회관계를 기반으로 한 의례 행위이다.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신을 만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종묘의 주인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국왕이다. 종묘가 있기에 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있기에 종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왕이 이 종묘 내에 거주하지 않는다. 종묘의 관리나 제향은 국왕의 명을 받은 대리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누가 국왕의 대리인이 될 것인가? 국왕은 자신에게 친근한 내관[내시]를 보낼 수도 있다. 제사인 만큼 종교전문가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조 시대 국왕의 명을 받은 대리인은 관의 공식적인 품계와 지위를 갖춘 관료로 한정되었다. 신을 부르는 데에도 관료의 신분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유교 국가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구축한 종교의 세계이다. 그러나 관료와 제사의 관계는 불완전하였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관원 중에서 누가 종묘에 근무하길 원할까? 그들에게서 종묘는 높은 지위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정조 때 종묘서(宗廟署)에서 왕의 명을 받아 『매사문』이란 책을 편찬한다. 공자가 태묘(太廟)에서 모든 일마다 물어보았다는 데에서 따온 제목이다. 그만큼 신중한 태도를 취하여 태묘를 공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매사문󰡕은 묻고 답하는 형식을 통해 종묘와 종묘 제향 관련 사항을 두루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수복을 학습시키기 위한 교재였다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종묘에 관한 일들은 수복에게 물어서 처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정조대에는 1년에 거행하던 제사가 347건이나 되었다. 이 숫자는 중앙정부에서 관할하던 제향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만큼 제향은 국가 제도 안에서 일상화되어 있었다. 종묘에 국왕이 진행할 경우 헌관과 집사자의 수가 140여 명에 이르렀다. 그 외 제사를 준비하고 제관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사람과 그들의 종까지 합하면 제향 당일 종묘는 매우 복잡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5~6시간이 넘는 제향의 시간은 공경한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횟수의 증대, 제향 시간의 장기화 속에서 국가 제사는 탈신성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명관(名官)들은 제관을 꺼리고, 그사이에 힘없는 관리들만이 제향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이렇게 관리들에게서 멀어지는 공적 제사는 점차 수복에 의존하게 되었다. 단묘에 고정되지 않았던 관리들보다 수복은 신역(身役)으로 맡아 감당하였기 때문에 전문가가 되고 있었다. 관료와 제례의 분리는 국가와 제사의 분리이며, 나아가 유교와 국가의 분리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상황의 변화에 수복이 있으며, 그들의 자리를 공민왕 신당이 보여주었다.

조선 역대 왕들의 사당인 종묘가 기억하는 역사가 있다. 공민왕 신당 또한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신당의 역사는 고려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시대 관노였던 수복의 역사를 대변한다. 지난날의 과거는 때론 이렇게 비천한 사람들을 통해서 기억되고 전승되었다. 그리하여 흥하면 망하는 역사의 법칙을 보여준다.

 


* 참조: 서영대, 「부군당신앙」, 『서울 2천년사 – 조선시대 서울의 종교와 신앙-』,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361쪽.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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