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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89호-북미 종교학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8. 10. 20:18

  북미 종교학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

 

news letter No.689 2021/8/3

 

 



     출판된 해가 2008년이니까 벌써 ‘옛날’입니다. Gregory D. Alles는 미국의 McDaniel College의 철학 및 종교학과의 교수입니다. 종교학사와 R. Otto를 살피는 분인데 문득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글로벌한 시대’인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제각기 다른 지역에서, 종교학(그는 Religious studies란 용어를 사용함)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조망’하고 싶은 꿈을 꿉니다. 이를 곧 실행에 옮기죠. 알고 싶은 호기심만이 그를 충동한 건 아닙니다. 그는 종교학의 미래에 대한 ‘글로벌한 비전’마저 다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Routledge에서 출판한 Religious Studies: Global View입니다.

    기획이 치밀합니다. 필자는 가능한 한 그 지역의 학자들이 담당하도록 했고, 당해 지역이나 국가의 종교학이 어떤 전사(前史)를 가졌는지, 어떻게 종교학이 비롯했는지, 어떻게 그것은 제도권 안에 자리 잡았고 어떤 주제들이 어떤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며 학문공동체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새롭게 도전받는 주제들은 어떤 것인지를 기술하도록 주문했습니다. 지역과 국가는 서유럽, 동유럽,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동아시아 대륙, 일본,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퍼시픽아일랜드,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로 나눴습니다. 애쓴 흔적이 뚜렷합니다. 찬반 간에 격론이 일법하기도 하죠. 두드러지는 것은 일본입니다. 올연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중국과 더불어 동아시아 대륙에 속했는데, 이창익 선생과 제가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

   막상 내용은 편자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필자들이 그의 지침을 ‘마음대로’ 조절했기 때문에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학문은 호흡이 자유로워야 하니까요. 저는 이번에 다른 일로 이 책을 모두 요약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북미의 경우를 이 게재에 조금 전해드려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종교학도면 이미 다 읽고 덮은 책입니다. 내용이 ‘정보의 수집’과 같아 이미 시의성을 상실한 것이기도 하죠. 그런데도 이런 엉뚱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랬을까는 독자들이 마음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래는 제가 요약한 내용입니다. 원문과 크게 다릅니다. 제가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것 위주로, 또 자극받은 것들만 뽑아 제 글 안에 제 투로 담았기 때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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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는 미국과 캐나다를 지칭한다. 이 두 나라는 현재 종교학의 종주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구도 업적도 영향도 세계적이다. 이 지역의 종교학을 개관하는 것은 종교학 자체를 섭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 수행한 학자는 비록 그가 <Numen>의 공동편집자이긴 해도 의외로 아시아 종교연구자인 Villanova 대학의 신학 및 종교학과 교수 Gustavo Benavides다.

   그는 글의 서두부터 편집자의 의도를 거스른다. 도대체 이 과제는 북미의 종교학을 되 추스르라는 거냐(성찰), 아니면 지금 현 상황을 느낀 대로 평가하라는 거냐(반응) 하고 묻는다. 그의 논의는 장황하지만 치밀하다. 다른 지역을 기술한 글들이 대체로 편자의 부탁을 따라 종교학의 전사(前史), 출현, 전개, 제도, 주요 과제 등으로 구성되었는데도 그는 이를 유념하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주제들을 항목화하여 개개 학자와 그의 저술을 중심으로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서술을 일정한 자기시각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진행한다. 그 항목은 ‘이론을 지닌 방법들’, ‘상징화와 인지(認知)’, ‘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들’, ‘신비주의와 감각’, ‘체현된 종교’, ‘전통들’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성찰’의 내용으로 기술한 개개 학자의 저술과 그 내용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아니다. 그는 이를 상당량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미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것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의 이해와 그가 전달하는 내용에 이견을 제기할 부분도 꽤 있다. 그만큼 우리는 이미 북미의 종교학을 ‘친근’하게 접해 왔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반응’은 상당히 자극적이다.

   그는 Eliade를 기준으로 해서 기술을 시작한다. Eliade를 선택한 까닭은 거의 희화적이다. 1963년에 그가 ‘1912년 이후의 종교학을 되살핀다.’는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를 준거로 해서 현재를 살펴보면 우선 종교학의 업적이 엄청나게 늘었다. 그는 ‘Eliade조차’ 이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게다가 인지과학이나 동물행동학 등이 종교학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도, Christianity가 아니라 Christianities를 운위해야 하는 것도, 그래서 현대가 ‘종교’라는 어휘에 회의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Eliade조차’ 짐작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Benavides의 북미의 종교학에 대한 반응은 이런 투다. 그의 반응을 이어가 보자.

   ‘종교’는 이제 광범위하게 그 개념의 타당성이 물어지고 있다. 그것은 서양에서, 그리스도교 권에서, 지어진 개념이어서 그 문화권 밖에서는 ‘실제로’ 타당성이 없는 개념이라는 것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북미의 종교학자들도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종교’라는 어휘나 개념을 버리거나 바꿀 생각은 없다. 이를 잘 드러낸 것이 Jonathan Smith의 발언이다. Smith는 ‘종교에 상응하는 자료는 없다. 종교는 다만 학자의 연구가 창조해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학문과 유리된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종교’가 이미 현실에서 떨어져 사실지칭 개념이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용되는 종교라는 범주’를 아예 지워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종교’라는 개념의 타당성이 충분히 승인되지 못하는 정황에서 제기된 이러한 주장은 이제까지 이 소용돌이에서 출구를 찾던 기존의 접근과는 전혀 다른 답변의 제시다. 그것은 기존의 논의를 폐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회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새로운 담론이기도 하고 능란한 회피이기도 하다.

   Benavides의 ‘반응’은 거칠다. 스미스의 이러한 발언은 개탄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종교적’이라고 표상화된 자료를 자기 나름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이제는 그의 발언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사건이든 사람이든 발언이든 사물이든 그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여기려면 학자들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물음의 대상을 승인받아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종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주장이 불행한 사태를 빚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종교를 상상된 것, 발명된 것, 지어진 것, 만들어진 것 등 무어라 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개탄스러운 것은 종교학자가 ‘종교적’이라는 사물에 대한 관심은 결여한 채 ‘종교는 학자들의 상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발언을 통해 그 사물의 과거도 현재도 아예 지워버리고, 그러니까 종교라는 현실을 모두 지워버리고, 오직 자기 생각 안에 있는 종교만을 좇아 종교학을 하는 일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념적인 데다 신학적임 마저 더한 그러한 태도다. 종교학이 종교가 되어가는 것이다. Benavides는 이러한 풍조가 지금 북미를 뒤덮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반응’은 또 다른 ‘문제’를 지적한다. 학계의 ‘단일 언어풍토’가 그것이다. 그는 JAAR(the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1952년까지만 해도 이 논문집에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논문이 실리기도 하고 그런 저서들의 서평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점점 줄더니 1996년 이후에는 전무하다, 문제는 종교학이 ‘다양성’과 ‘타자’에 대한 논의를 펼치면서도 종교학계의 실상은 닫힘으로 굳어져 있다는 역설이다. 언어만이 아니다. 이론에 관한 논의도 심각하다. 하나의 이론이 형성되면 그것을 검증할 여유도 없이 그 이론에 대한 후-이론이 등장한다. 학문의 장이 마치 새로운 상품의 생산을 시의적절하게 내놓아야 이득을 올리는 시장과 같이 되었다. 이론을 만들기 위한 ‘튀는 통찰’, ‘유려한 화술이나 문장’, ‘눈길을 끄는 매혹적인 재치’가 ‘이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유통되는 한 그것은, 또는 그것만이, 종교학이 된다.

    이러한 기술을 하면서도 Benavides는 자기가 설정한 주제에 관한 학자와 저술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비판적 ‘성찰’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가 ‘반응’과 ‘성찰’을 마치면서 ‘긍정적이면서도 걱정스럽게’ 지적하는 북미 종교학의 ‘다른 경향’이 있다. 이미 언급했지만 북미의 종교학계가 서서히 ‘고백적’으로 되어간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현상은 학자로 하여금 자기가 학문의 주체라는 자각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의식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노작은 그와 그의 주장을 독선적이고 독단적이게 한다. ‘논쟁의 현장’에서 이를 확인한다. 그러한 자리에 이른 학자는 당해 주제나 분야의 이른바 ‘석학’이다. 그러한 학자나 이론은 ‘성공한 연예인’처럼 된다. 이미 북미의 종교학계는 몇 개의 두드러진 ‘연예인 의례(the cult of celebrities)’로 판이 그어져 있다. 종교학자들을 거명하는 것을 피해 에둘러 예를 든다면 ‘Derrida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종교 읽기’가 그런 것 중의 하나다. 이름이 내용을 넘어선다. 아니면 이름의 후광 아래에서 그의 이론이 그대로 수용된다. 북미 학계의 컬트는 이렇다. 미국 사회가 지금과 달라지지 않는 한, 세계가 지금의 질서로 글로벌한 이념을 지탱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이 컬트는 더 심화될 것이다.

    Benavides가 부정적인 진술만 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비판과 긍정이 그의 글에 넘친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북미의 종교학을 새롭게 만나는 계기를 우리가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다. 그것은 우리를 되살피는 호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고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저서로《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종교문화 읽기》,《경험과 기억-종교문화의 틈 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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