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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86호-물(物)과 애니미즘에 관한 작은 연구노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1. 7. 13. 17:50

물(物)과 애니미즘에 관한 작은 연구노트

 

news letter No.686 2021/7/13

 



본 뉴스레터 681호(2021년 6월8일자) 유기쁨 선생님의 <물체의 영혼, 물체의 활력>과 683호(2021년 6월22일자) 도태수 선생님의 <물질의 존재론과 성물의 의미>는 공통적으로 ‘물’(物)의 문제를 다룬 흥미 있는 글이다. 전자가 ‘타일러 깊게 읽기’를 통해 인간과 사물을 둘러싼 수동성과 능동성의 문제, 물체의 생명성과 사물의 힘에 대해 언급했다면, 후자는 그것을 ‘물질적 전회’와 ‘물질의 존재론’으로부터 접근하고 있다. 거기서 소개된 제인 베넷, 부르노 라투르, 마릴린 스트래선을 찾아 읽게 된 것은 내게 작지 않은 기쁨이었다. 아울러 유기쁨 선생님의 큰 업적인 역서 타일러의 『원시문화』를 꼼꼼히 되짚어볼 수 있었던 것 또한 좋은 수확이었다.

대권의 계절이 시작되면서 새삼 인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럴듯한 말들은 많은데 왜 이렇게 인물은 없을까? 저 사람이 혹 그 인물일까? 사전에 따르면 인물(人物)은 일차적으로 사람과 물건을 뜻한다. 인성과 물성의 동이(同異)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조선 후기의 호락논쟁(湖洛論爭) 즉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의 ‘인물’이 그러하다. 하지만 오늘날 일상적인 어법에서 인물의 사전적 의미는 대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 뛰어난 사람, 사람의 생김새, 사람의 됨됨이 등으로 사용되어 물건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런데 왜 인물에 ‘물’이 붙어있는 것일까? 이 어법의 이면에는 혹 사람도 물(자연)의 일부라는 무의식적인 발상이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발상은 애니미즘과 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과 애니미즘의 깊은 인연은 “물은 만물이다. 소(牛)는 대물(大物)이다. 천지만물은 견우(牽牛)에서 생겨난다.”라는 허신의 <설문해자> 풀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소는 신들에게 봉헌하는 희생물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물이라는 말은 고대 주술종교에서 유래한 용어인데, 그것이 더 확장되어 만물이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을 보인다.

애니미즘은 오랫동안 서구 학계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된 용어였는데, 근래 신애니미즘 담론이 활발하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인류학자 버드-데이빗의 “애니미즘의 재등장”(‘Animism’ revisited, 1999)이라는 논문이었다. 이어 2000년대 이후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몇 년 전 <책 한권 읽기>에서 다루어진 적이 있었다)의 『애니미즘』(Animism, 2005) 및 그가 편찬한 『현대 애니미즘 핸드북』(The Handbook of Contemporary Animism, 2013)이 나왔다. 이 중 후자는 학계의 애니미즘 연구에 있어 이정표라고 말해질 만큼 중요한 책이다.

애니미즘의 해석, 재현, 범주화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들이 있다. 애니미즘은 철학/사상(프로이트)인가 종교인가? 혹은 신화(레비스트로스)인가 시학(잉골드)인가? 그것은 인식론(거슬리/버드-데이빗)인가 존재론(데스콜라/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인가? 다양한 시선의 엇갈림에도 불구하고 타일러의 애니미즘 정의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타일러의 (구)애니미즘과 신애니미즘의 중요한 차이는 무엇일까? 첫째, 신애니미즘 담론은 애니미즘을 보다 적극적인 개념으로 상정한다. 둘째, 신애니미즘 담론은 광의에 있어 애니미즘을 근대성의 근본적인 전제에 직접 도전하는 개념으로 간주한다. 셋째, 신애니미즘 담론은 하비의 말을 빌자면 “다른 퍼슨(person)들과의 바람직한 관계 안에서 좋은 퍼슨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 그리고 모두가 인간은 아닌 퍼슨들에게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아는 것”에 관심을 가지며, 또한 “여러 측면에서 서구 근대성에서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과는 상이한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자 애쓴다.”1) 이런 비전을 공유하는 까스뜨루는 이른바 ‘존재론적 전환’의 자리에서 애니미즘을 세계의 지속적인 탈식민화를 위한 도구로 본다. 이리하여 신애니미즘 담론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초래했다. (1)식민지적 편견과 경멸의 흔적을 버리고자 애쓴다. (2)애니미즘을 근대성 성찰의 비판적 도구로 사용한다. (3)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비전으로 애니미즘을 차용한다.

애니미즘에 대한 이런 새로운 관심은 중요하다. 그것은 고립된 관심이 아니며 현대사회에 있어 다음 몇몇 중요한 변화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1)생태계 위기에 따른 탈인간중심적 생태주의 및 탈휴머니즘적인 포스트휴머니즘 또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광범위한 확산. (2)새로운 스피리추얼리티 운동(일본의 경우 스피리추얼리티붐 혹은 신영성운동). (3)근대성 및 특히 그 전제를 이루는 인간-자연의 이분법에 대한 일반적 회의론의 등장. (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비롯한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 의해 촉발된 대중문화에 있어 애니미즘적 이미지의 세계적 유행.

이 가운데 (2)와 (4)는 특히 일본의 애니미즘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 학계에서 오랫동안 애니미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거론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기이하게도 오직 일본에서만은 그것이 일본문화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그리고 일본사회의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고도로 산업화된 일본은 동시에 지극히 고대적인 것이 공존하는 ‘애니미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가 서구의 심층생태학이나 뉴에이지적 사고 혹은 스피리추얼리티 운동과 관련된 많은 흐름이 제시하는 비전들은 일본에 널리 유포된 지적 유행과 현저하게 유사하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지적 흐름에 있어 생태학적, 뉴에이지적, 신영성문화적 사고를 중시하는 경향이 오래 전부터 있었고 2천년대 이후 특히 더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일본어로 ‘물’은 ‘모노’(物)라고 하는데, 이 모노는 사물이나 사건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일본문화는 한 마디로 이런 ‘모노의 문화’라 할 수 있다. 거기서는 예로부터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생물을 모두 포괄하는 ‘모노’에 생명과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여 수명이나 역할을 다한 낡은 ‘모노’에 대해 외경과 감사의 념을 표한다든지 혹은 미련이나 애착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전통을 ‘모노공양’이라 한다. 오늘날 일본 전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모노공양의 대상은 부채, 시계, 그릇, 다도구, 농기구, 연필(붓), 안경, 인감, 카메라 등의 일상용품은 물론이고 바늘(재봉업), 가위/빗(미용업), 의치(치과), 젓가락(요식업) 등 업계 관련의 물품을 비롯하여 펫, 군마, 군견, 복어, 곤충, 실험용 동물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근래는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가령 파소콘(퍼스널 컴퓨터)공양이나 핸드폰공양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대상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2)

한편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라는 일본의 공학자는 『로봇 안의 불성』(The Buddha in the Robot, 1981)이라는 저서에서 흥미롭게도 인간뿐만 아니라 바위, 나무, 강, 산, 개와 곰, 곤충과 박테리아, 그리고 기계와 로봇 안에도 불성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서구에서는 이와 같은 첨단공학적인 현대일본에 신애니미즘을 적용시켜 ‘테크노-애니미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령 젠슨과 블록은 인간이 아닌 것들 즉 어빙 할로웰이나 하비가 말한 ‘퍼슨들의 세계’와 가지는 관계의 운반체로서 신도(神道)를 지목한다. 신도는 복잡하고 근대화된 고도의 테크노-과학적인 일본 안에 살아있는 테크노-애니미즘의 일형태라는 것이다.3)

그런데 정작 ‘모노의 문화’ 일본의 애니미즘 담론은 대단히 복합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왜곡을 수반하기 십상인 ‘일본적인 것 혹은 일본다운 것’(Japaneseness)이라는 개념과 함께 얽혀 있기 때문에 다루기가 쉽지 않다. 이른바 ‘일본인론’의 성격을 띤 대표적인 사례로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와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의 애니미즘론을 들 수 있다. 일본 국책기관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초대 소장을 역임한 우메하라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렇다: “신도와 일본불교 모두 애니미즘 원리에 입각해 있다. 국가신도적 요소를 차지한다면 애니미즘은 신도의 핵심이다. 또한 ‘초목국토 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 개념으로 표상되는 일본불교의 토대를 만들어준 것도 애니미즘이다. 애니미즘은 인류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세계관이다. 애니미즘을 잃어버린 고등종교(기독교)는 심각한 철학적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다신교적인 애니미즘이 일신교적 문명들에 의해 파괴된 세계를 구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4) 야스다는 이런 우메하라의 주장을 더욱 단도직입적으로 확장시켰다. 야스다는 저서 『일신교의 어둠: 애니미즘의 복권』의 부제 그대로 “지금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애니미즘의 덫을 놓을 때”5)임을 강조한다. 북미와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근본적으로 세계의 숲을 파괴시킨 책임이 있고, 아시아의 도작-어로민들은 애니미즘에 입각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메하라는 일본만이 애니미즘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중국의 도교와 유교, 인도의 힌두교, 한국의 샤머니즘 등도 애니미즘 전통에 속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국가신도주의자도 아니고 국수주의적 야마토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메하라의 애니미즘 담론은 여러 면에서 논쟁적이다. 첫째, 우메하라는 일본과 일본문화의 애니미즘적 전통을 이른바 ‘유럽적 근대성/문명’ 외부에 위치시키면서 그 외부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일본의 특징으로 제시된 우월한 특성들과 함께 일본과 일본의 ‘타자’(서구)라는 이분법적 틀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인론’에 전형적인 틀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역-오리엔탈리즘’이다. 그러한 접근은 일본 내의 사회계층적 차이나 지역적 차이 및 나아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중심-주변의 관계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우메하라가 애니미즘을 동아시아 담론의 차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의의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때 직접 애니미즘을 끌어들이기보다는 ‘물’이라는 일종의 매개체 혹은 우회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중용』은 “성이란 물의 처음과 끝이니 성이 아니면 물도 없다.”(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물은 단지 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외의 사람과 사물 모두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것은 자기를 ‘안’으로 하고 사물을 ‘바깥’으로 삼아 그 내외를 합하여 논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통일을 지향한다.

넓게 보자면, 인간(주체/내)과 물(객체/외)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일종의 애니미즘적 발상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부터 이규보의 ‘여물’(與物)사상, 김시습의 ‘애물’(愛物)사상, 강백년(姜柏年)의 ‘물물’(物物)사상,6) 홍대용의 ‘인물균’(人物均)사상7) 및 ‘활물’(活物) 개념, 최시형의 ‘물물천’(物物天)・‘사사천’(事事天) 사상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정신사에 하나의 큰 광맥을 이루고 있다. 그 광맥을 따라 특히 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물’사상을 비교 고찰하는 작업이 당분간 나의 연구과제가 될 듯싶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2021) 중, 흑산도로 유배당한 정약전이 강진으로 유배당한 동생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이제까지 성리학, 노자, 장자, 서학, 가리지 않고 공부한 것은 한마디로 사람이 갈 길을 알고자 했던 것인데, 이 놈(섬사람 창대)이 물고기에 대해 아는 것만큼도 알아낸 것이 없지 않은가. 하여 이제부턴 애매하고 끝 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증한 사물 공부에 눈을 돌리기로 했네.” 눈물 나도록 공감 가는 고백이다. 그러면서도 인문학도랍시고 ‘사람 공부’에 대한 허허로운 미련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이렇게 못나 보일 수 없다. 스스로를 어딘가로 유배 보내야 겨우 바뀌려나? 15,6년 전 딸아이와 함께 찾았던 흑산도에서의 홍어맛이 아직도 혀끝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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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raham Harvey(2005), Animism: Respecting the Living World, London: Hurst & Co., p.xi.

2) 박규태(2021), “모노(物)공양: 불교문화 콘텐츠의 일본적 변용”, 『불교평론』 86.

3) Casper B. Jensen & Anders Blok(2013), “Techno-animism in Japan”, Theory, Culture & Society, 30(2), p.87 및 p.97. 이에 비해 나는 일본의 사례를 ‘신불(神佛)애니미즘’으로 지칭한 바 있다. 박규태(2017), “신불(神佛)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일본비평』 17,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4) 梅原猛(1989), “アニミズム再考”, 『日本硏究』, 國際日本文化硏究センター.

5) 安田喜憲(2006), 『一神教の闇: アニミズムの復権』, ちくま新書, 60쪽.

6) “물물(物物)이 저마다 하나의 태극을 지니고 있다.”(『雪峯遺稿』)

7) “인간의 입장에서 물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면 물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은 균등하다.”(『毉山問答』)는 구절처럼, 사람과 금수와 초목이 모두 동등하다는 사상.

 









 


박규태_
한양대학교 교수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 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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