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786호-영동선을 달린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7. 11. 18:19

영동선을 달린다

 

 news letter No.786 2023/7/11

 

 

 

영동선과 기억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의 첫 장면을 기억하시는지요? 막 군대를 제대하여 집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 막동(한석규)이 열차 난간에서 바람을 쐬다가 앞쪽 열차 칸 너머에서 날아 온 미애(심혜진)의 장미빛 스카프를 뒤집어쓰는 장면입니다. 지금은 이런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은 달리는 중 열차 칸 문을 개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드라마 모래시계(1995)의 열풍으로 정동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청량리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 새벽 무렵 해변에 내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게 해서 갈 수 없는데, 정동진으로 가는 그 밤 기차는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대신 지금 정동진역은 서울-동해로 이어지는 강릉선 KTX를 이용하여 2시간 남짓이면 쉽게 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차의 내부 변화와 노선의 변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동선을 과거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KTX 이용자인 승객의 추억만으로 영동선은 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영동선이 통과하는 지역에서 무궁화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직업적 근로자들에게 열차는 현재도 계속 달립니다. 저는 지난 몇 해 동안 동해 근대산업도시 구술자료집을 만들고 있는데, 올해는 영동선의 각종 직역들의 기억을 담습니다. 간단히 살펴보면 영동선은 1963년부터 불린 이름이고, 그 이전에 가장 오래된 선로인 철암선(철암~묵호, 1940년 개통)과 영암선(영주~철암, 1955년 개통) 등이 이 철로 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의 기차들은 철암, 통리, 도계 등 삼척탄전지대의 석탄, 철광석, 시멘트 등 각종 산업 물자를 묵호항역이나 타지역으로 수송하는 것이 주 임무였습니다. 여기에는 기관사, 기관차 정비, 객화차 업무, 전기설비, 역무원, 시설(보선) 등 다양한 직렬이 있는데, 이번에는 1947년 입사(1928년생)하신 어르신에서부터 올해 630(60)로 퇴직하는 근로자들을 기록합니다.

 

 

기억과 종교

철로를 이용하는 손님들과 철로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다를 것입니다. 철도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우리들의 평범한 이웃이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의 한쪽 면은 위험하고’,‘어둡고’,‘불규칙하며’,‘소음으로가득한 일상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무리 장밋빛 희망을 담은 여객 열차를 몰고 대도시를 향해 달릴 때도 그러합니다. 영동선은 우리나라 철로 가운데 가장 위험하여 모두가 꺼리는 노선이라고 합니다. 열차는 고도차가 완만해야 하고 회전율이 낮아야 하지만, 영동선은 그렇지 않은 구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동선은 구간(193.6Km)에 비해 터널이 많고 길며, 새벽에도 기관을 정비하고 달려야 하는 산업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종교는 어떻게 있는 것일까요?

 

첫 화물기관 운전을 나갔을 때, 술에 취한 채 철도를 베개 삼아 자고 있는 사람의 목을 자른 기관사의 기억은 교정될 수 있을까요? 기관사는 운전대가 없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고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는데, 터널을 빠져나와 커브를 돌자마자 누워있는 취객을 무슨 수로 피한단 말입니까. 이 합리적 설명은 범죄를 구성하지는 못해도 업력(業力)의 종자(種子)로 작용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또 직렬이 서로 다른 동료가 야간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출발하는 동차에 다리가 절단된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눈발이 하염없이 내려 기차가 더는 앞으로 못 나가서 우두커니 단선 철로 위에 멈춰선 기관사의 마음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철길을 건너는 수없는 가축이며 야생동물을 치고 나가야 하는 기관사는 또 어디에 빌어야 할까요?

 

 

저는 문득 궁금하여 이들에게 종교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기관사의 대부분이 불교, 개신교, 그리고 천주교를 신앙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포교사도 있었고 장로도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도 무사히를 열차에 달고 살았던 사람들을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기억은 없앨 수는 없지만, 업과 보의 연속성 아래 윤회하는 오온(五蘊)의 상속(相續)하고 전변(轉變)하며 차별(差別)되는 길이 있을 뿐일 것이라고. 그들에게 종교는 자아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무아인 자아가 맑아지는[淸淨無我] 단계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영동선의 종교는 그렇게 있는 것이며 또 그렇게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심일종_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유교제례의 구조와 조상관념의 의미재현」(2017)으로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에서 「조선시대 유‧불 의례의 상관성 연구」(2023)로 또 하나의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는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 산』(공저)과 『유교와 종교의 메타모포시스』(공저)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다종교시대 한국현실과 불교의 대응」 등이 있다.

댓글